다음 대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비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힘든 여행이 될 것 같아 준비를 할 겸 20kg짜리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한 첫날이었다. 헬스장에서 들었던 20kg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에 놀라 하고 있을 때쯤 원장님께 문자가 왔다.
수상 축하드려요
문자를 보고 바로 사이트에 들어갔고 결과는 장려상이었다. 이미 기분의 밑바닥을 찍고 와서 그런지 고된 등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보다 큰 반응이 오진 않았다. 짜릿하고 신나는 느낌보다는 뭔가 담담하고 안심했던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거창하게 무언갈 하기보다는 조촐하게 선생님들과 축하를 한 뒤 한 달 동안은 피아노에 손도 대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와서 다시 2주가 남은 시점부터 다시 피아노를 쳤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그전에 쳤던 것보다 훨씬 잘 쳐졌다. 구체적으로는 테크닉적인 1,3악장이 아니라 부드러워야 하는 2악장에서 음악적인 부분이 굉장히 도드라졌다. 선생님도 눈물이 날 뻔했다고 하셨고 나도 처음으로 잘 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연주였다. 다시 연습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주말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연주자 외에 상을 받으러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또 욕심을 내서 다시 기초부터 다지고 싶어 진다. 저번에 열었던 연주회에 이어 이번에는 더 큰 규모로 연주회를 정말로 기획해볼까, 이번엔 장려상을 받았으니 다음 대회에는 3등 안에 들지 않을까라는 희망 회로가 무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또다시 무한대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 시작한다. 그러다 또 열심히 연습하기로 마음을 먹고 연습실에 들어가면 막상 잘 처지지 않아 얼마 안 돼서 그만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면 또 저번 편처럼 어디까지 연습해야 하나 하며 현타가 올 것이고 어디까지 내 삶에 피아노를 들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정말 아마추어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고민도 하다 연습도 하다 두 번째 다른 대회 일주일 전부터는 집안일 때문에 연습할 시간도 매우 부족했고 기본적으로 지친 상태라 연습을 많이 할 의지도 없었다. 매일 연습은 했지만 전에 탄 장려상과 너무 완벽했던 2악장의 연주가 나를 대회의 압박감에서 풀어지게 했다. (대충 이틀 전에 술 마셨다는 뜻) 그 압박감은 콩쿠르장에 들어가 내 차례가 된 후 건반을 누르고 나서야 시작되었고 저번 대회보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 제대로 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 대회에선 아무런 입상도 하지 못했다. 결과 대회를 보자마자 그제야 지금까지 일 년 동안 준비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콩쿠르 끝난 기념으로 깐 위스키. 저 술을 다 마실 때쯤 수상 결과가 나왔다.
참 애매한 결과이다. 아예 입상하지 못한 콩쿠르와 장려상을 받은 콩쿠르. 그만두기에 너무 아까운 실력이고 계속 치기엔 너무 지치고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하는 실력이다. 이번 결과가 저변 편의 타협점을 더 만들기 힘들게 해 주었다. 내 삶에 피아노를 더 들이는 게 이득이 되는 건가 아닌가.
피아노가 있는 삶과 없는 삶 모두 사랑하기에 객관적인 타협점은 아마 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콩쿠르가 망했다고 생각한 날은 평생 그만 쳐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또 장려상 같은 성취감이 몰려오면 또 더 노력해서 실력을 늘리고 싶다. 아마 평생 이 루틴이 반복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연습시간을 정확하게 정해도 어느 날은 그것보다 많이 치고 싶고 어느 날은 정한 시간보다 훨씬 적게 치고 싶어질 것이다. 아니면 아마 아예 관두고 싶어질 날이 또 올 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나의 생각은 변한다.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경험이 쌓이는 것과는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