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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개돌개 Jun 07. 2024

제16회 서울국제노인영화제 '단편경쟁3' : 감상 후기

그들의 노인은 사각지대를 벗어나는가. 혹은 어쩌면, 사각지대로 향하는가?

< 제 16회 서울국제노인영화제 >

 24.05.31 ~ 24.06.03

노년의 삶을 영화로 이해해보는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영화 축제.


제16회 국제노인영화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나 또한 극작이라는 도구를 통해 노인문제에 대한 발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젊고 어릴지라도 결국 인간은 모두 노화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젊은 감독들 또한 다가올 미래라 생각하며 노인에 대한 발화를 어렵지 않게 꺼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늙지 않은 노인 : 당신과 나의 이야기> 를 주제로, 늙지 않은 노인과 노인이 될 우리의 꿈과 희망, 슬픔과 좌절을 만나보자는 영화제는 노인으로서의 미래를 걱정하고 이를 창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나의 발걸음을 움직이기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소개에 앞서, 영화제가 열리는 종로의 공간성에 집중해보려 한다. 종로 3가는 상당히 특이한 장소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이전에는 노인들만의 아지트이고 쉼터이자 연륜 있는 장인들의 세공 소리가 멈추지 않던 곳이었다. 하지만 익선동이 떠오르는 힙한 데이트 코스로 발전하고, 한국의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외국인이 유입되며 젊은이, 노인, 외국인 3가지 집단의 콜라보레이션이 형성되어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다양한 세대가 함께 이뤄내는 노인영화제 라는 콘셉트에 절묘하게도 걸맞는 장소 선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젊은 외국인들이 가득한 익선동에서 벗어나 종로3가 역에서 가까운 CGV피카다리1958로 들어서자 그 안은 노인들로 가득했다. '영화제'에 집중해 영화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웅성이는 사람들 중 젊은이는 나와 동행인 뿐이었다. 나는 잠시 나의 편협한 시각에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국제노인영화제는 단순한 영화제가 아닌 '노인'영화제였다. 그 영화제의 당사자이자 주인공인 이들이 모여있는 것이 어디가 이상하단 말인가. 국제노인영화제가 열리는 이곳에서만큼은 젊은이인 나는 잠시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온통 젊은 사람들과 키오스크 기계가 가득한 영화관에서 노인들이 느꼈어야 하는 감정이 이러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영화제에서는 섹션11까지 수많은 영화가 준비되어 있지만, 내가 선정한 섹션은 단편경쟁3: 사각지대 였다.


"거대하고 정교한 구조일수록 놓치는 틈새는 더욱

많아지고 그 균열은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국가적 차원의 배려, 복지시스템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과 대안에도 불구하고 음지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사회 구석구석 숨겨진 얘기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세션 소갯말도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이 세션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사각지대, 익숙한 단어였기에 더욱 이끌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전, '버뮤다 사각지대' 라는 제목으로 노인과 노동소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희곡을 창작한 적이 있었다.


똑같이 노인문제와 사각지대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어쩌면 나도 영화제에 관객이 아닌 감독으로서 참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또한 있었다. 이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 감상이기에 이만 하고 영화에 대한 본격적 소개와 감상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서론이 길어졌다. 아직 읽어주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과의 말을 올린다.


<들어보지 못한 (Things Unheard Of)> 라마잔 킬릭/ 튀르키예 / 극영화/ 16분


마을을 돌아다니며 민족성을 검열하는 일당이 소녀와 할머니의 집을 찾아오고, 할머니에겐 유일한 세상과의 창구였던 TV가 부셔져 버린다. 할머니의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띄우려는 작은 소녀는 망가진 TV의 프레임을 떼어낸다. TV의 프레임 안에 마을 사람들을 담기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소녀는 할머니를 TV 프레임 안에 담고, 한번도 움직이지 않던 할머니의 입이 오물거리기 시작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시작에서 "나는 튀르키예 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자막이 홀연히 등장했다 사라진다. 이 영화는 억압 당하는 튀르키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 할머니는 TV에서 나오는 미디어를 나오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단순한 수신인으로 등장한다. 소녀의 집으로 들어온 검열단을 포함하여 관객들 또한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속성을 검열 당하는 마을의 어른들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순응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린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순수함이 가진 용기와 힘 덕분일까. 소녀는 부셔진 TV의 프레임을 떼어내여 자신의 이름을 딴 채널명을 붙이고 스티커로 장식한다. 소녀의 기지로 인해 TV의 프레임 안으로 수동적이었던 수신자들이 들어가게 된다. 외부의 자극에 그대로 노출되어 따르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발화를 시작한다. 수신자가 발신인이 되는 역전을 거쳐 시작하는 짧은 발화는 그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억압 당한 그들의 민족성으로 연결되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TV로 듣지도 못하게 하는 그들의 언어로 마을 포격에 대한 뉴스를 읊거나 전통 노래를 부르며 발신인과 수신인 모두 행복에 겨워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등장하였던 문장, "나는 튀르키예 인이다" 라는 그 진실하고도 무거운 한 마디를 그들은 발신인으로의 역전을 통해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녀의 TV프레임은 이러한 면에서 영화 내 상징물로서도 그들에게도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담으려 했던 사각지대는 '억압 당하는 민족성의 사각지대'가 아니었을까. 

마지막에 은은한 미소를 띄운 할머니를 향해 소녀는 기대에 찬 얼굴로 프레임을 들이댄다. 할머니는 입을 우물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소녀는 할머니에게 드리운 프레임을 거두지 않는다. 할머니의 입에서 기어코 터져나올 말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듯이...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수신만을 해왔할머니는 처음으로 어떤 말을 발화하게 될 것인가. 그에 대한 상상은 나를 비롯한 관객들, 그리고 이 영화 소개를 보고 있는 모두에게 맡겨진다.


<벌레> 명세진 / 극영화/ 23분

이제 막 성인이 되어 할머니와 함께 사는 공장노동자 김하나에겐 노동조합이니 하청계약직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을 이해할 수 없다그저 할머니와 둘이 생활할 수 있는 돈이 절실할 뿐이다. 하나는 노조 가입을 거절하고 하청계약직이 되어 일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현장직에 대한 멸시와 사실상 해고 뿐이었다. 하나는 공장에서 나가지 않으려 버티지만 결국 직원에게 내쫓기게 되고... 공장 문 앞에서 하염없이 울던 하나는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버린다. 벌레가 된 하나는 사장실로 들어가 사장 옆을 맴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서류철에 맞아 마지막 날갯짓 마저 멈추게 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깔끔하고 잘 만들었다. 서스펜스와 기승전결 또한 자로 잰 듯 정확한 곳에서 제 역할을 해낸다. 극 내의 모티프와 상징 또한 명징하기에 과연 수작이다.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없다. (...)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겪는 주인공 하나에게서는 프란차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 생각났다.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질 때 명세진 감독님께 위 소설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이 맞는지 여쭤보았을 때에는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의 제목 또한 변신이었지만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바꾸게 되었다는 의외의 말씀까지 해주셨다. 모티프의 적절한 사용와 변형이라는 극작 문법의 예시로 들 수 있을 정도로 명징하게 느껴지면서도 그것이 서사 내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 내에서 말하는 사각지대는 '어린 여성으로서 가지게 되는 사각지대'를 말하고 있다. 어리기에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뒤늦게 이용 당하고 쉽게 버려지고야 마는 하나의 모습에 서사의 축이 머무른다. 노동소외와 여성에 대한 서사로서 완벽했다. 그럼에도 완벽한 작품이기에 더욱, 노인서사보다는 여성서사에 초점을 두고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이 작품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극 안의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 주인공 하나, 노조를 이끄는 여성 조연, 사실상 해고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여성 조연까지도-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영화에 대한 리서치를 하다가 발견한 수상이력에 여성영화제 수상 이력이 있었다. 그럴만한 작품이다. 상업적인 동시에 예술적이며 사람의 가장 자극받는 지점을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건드는 부분이 있다. 특히 하나의 할머니가 곰팡이가 핀 떡꾹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는 부분을 비롯하여 할머니에게 화를 내며 울분을 토하는 하나의 모습은 동행인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정에 매몰되게 했다. 홀린 듯 영화에 빠져들어 짧은 23분 이라는 시간 안에서 일반적인 1시간 이상의 영화 이상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영화가 수작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노인영화제에 어울리는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의 여지가 필요하다. (작품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여성서사로서 이 작품을 보았다면 칭찬만이 일색이었을 것이다. 노인서사로서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극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자신의 이름이 있다. 그런데 왜 하나의 할머니에게는 '할머니' 라는 이름 밖에 붙여지지 못했을까? 명세진 감독님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사람의 노동 소외가 그 가족 전체, 즉 할머니에게까지 파괴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왜 할머니의 파괴에는 집중하지 않았는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진정 노인소외를 담은 것이 맞는가?


<모과향> 최은화 / 극영화/ 13분

권위와 체면그리고 술만 아는 남편과 헤어진 영이는 늦은 나이에도 열심히 노력하여 목표한 미용사가 된다어느 날 쓰러진 치매 걸린 할머니를 구해드린 계기로 요양원에서 미용봉사를 하게 되는 영이. 봉사를 이어가던 중 그녀는 새로운 이발환자가 남편임을 발견한다. 자기를 인지 못하는 치매 환자가 된 엣 남편에 대해 한없이 슬퍼하면서 영이는 또 한사람을 위해 봉사하려 한다. 함께 오르막길을 오르는 영이와 남편의 발걸음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가 시작되며 모과향이라는 제목과 함께 직접 그린 그림이 크레딧으로 올라간다. 지직거리는 음질, 툭툭 끊기는 영상, 세월이 여실히 느껴지는 화질...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단편경쟁 우승작으로 고르고 싶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머릿속에 남은 감상이자 이 작품을 우승작으로 뽑은 이유는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당사자성에서 나오는 진실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영화인 모과향은 그렇기에 가장 살아있는 영화로 느껴졌다. 노인 복지관에서 노인 감독과 함께 만들어낸 첫 작품은 분명 어설프고 촌스럽고 오래된 세월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실하게 그 자체로 노인의 삶을 담고있다.

늙음도, 치매도, 중풍도 감독의 시선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현상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밥을 먹고도 배고프다고 외쳐대는 치매 노인을 어설프게 연기하는 장면에서는 관객석에서 어르신의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치매를 단순히 두려운 것, 슬픈 것으로만 여기며 하나의 극적 요소로 이용하는 젊은 사람들의 시선과는 확연한 차이였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결국 아무리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이입해보려 해도 직접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말로 꺼내고 카메라로 연출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관점으로 변질된 사념으로 변해버린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지 못했지만 곧 겪게 될 미래에 대해 비관하며 만들어내는 노인에 관한 가볍고 편협한(타 영화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노인과 노동 문제에 대한 극을 썼었고 그 안에서 노인을 단순한 문제로만 보았던 나의 편협함을 반성하는 중이다...) 사념을 담아 만들어낸 극적 요소로서의 노인만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저 불쌍하고 울음을 유발하고 막막하기만 한 인물로 나온다. 젊은이들이 보는 노인이 그러했기에, 젊은이가 바라보는 렌즈를 통해 굴절되어버린 노인이라는 상은 더 이상 실제의 노인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관객과의 대화 중 한 어르신 관객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노인영화제라 하기에 노인이 만들어낸, 노인만이 출연하는 영화를 생각했지만 감독도 젊은 사람이고 배우도 젊은 사람이 열연을 하네요? 노인영화제의 출품 기준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문득 들으면 그래서 뭐? 노인들만 출연하고 만드는 영화가 해봐야 얼마나 되겠다고? 그걸 왜 감독에게 묻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모과향이라는 영화를 보고 그 의미를 뜯어본다면 이 질문에는 아주 날카롭게 뚫고 지나가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 노인 영화제에 담기는 노인의 모습은 그들 당사자가 바라보기엔 진정한, 살아있는 노인이 아닌 것이다. 단순히 '노인=치매, 늙음, 차별, 막막함, 문제적' 이라는 하나의 정해진 문법으로 만들어낸 극적 요소로 영화 내에 등장했을지 모른다는 지적을 피해갈 수 없다. 그렇지만 모과향은 어떤가. 노인 당사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들의 삶에서도 희망을 본다. 더 나아갈 길을 찾는다. 이 괴리 때문에 어르신은 이 영화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표한 것이 아니었을까. 노인영화제에서 진정한 노인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의 진정한 삶은 어디로 갔는가. 노인은 결국 다시 이용되고 소외 당해야 하는가.

결말 부분에서 이러한 괴리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머지 3가지의 영화에서(비교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3가지 영화 모두 너무 수작이고 즐겁게 잘 보았다.) 결국 노인은 멈춰 서서 막막한 채로 끝나는 결말 뿐이 남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유일하게 영화의 엔딩을 걸어가는 동선으로 마무리 한다. 마치 고레에타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들은 끝까지 걸어간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서, 더욱 더 높은 곳으로, 용서와 삶을 향해. 미웠지만 그럼에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발을 함께 맞추며...

이 영화의 제목은 모과향이지만 모과향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과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대사 또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과의 질문에서 제목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최은화 감독님은 말씀하신다. 모과향은  힘든 삶의 과정에서도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주인공 그녀를 뜻하는 것이다. 그녀에게서 모과향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모과향을 떠올렸다. 모과향은 한순간의 강렬함은 없지 않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리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은은하게 퍼져가며 공간을 향기롭게 채워준다. 뒤늦게 남편의 경제력을 벗어나 자립을 시도하지만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변변히 실패하고, 그럼에도 끝내 자신의 미용실을 차려 노인 복지관에서 봉사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뒤늦게 아름다운 향을 발하는 모과향과 닮아 있다. 하지만 또 한 명의 모과향이 존재한다. 어쩌면 조금 늦게 영화 감독에 도전했다고 할 수 있으나 최근에는 법정 드라마를 완필하셨고, 아직도 영화를 찍고 싶으시다는 최은화 감독님에게서 또한 모과향을 느낄 수 있었다. 되돌아 보고 곱씹어볼 수록 모과향은 나의 마음과 생각을 풍족하게 채워준다. 이런 영화를 볼 수 있어, 최은화 감독님을 마주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그냥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출 알았지> 남현우 / 극영화/ 26분

의료급여 심사를 받기위해서는 아들의 금융정보제공동의서가 필요한 현자.

심란한 마음으로 폐지가 가득 쌓인 리어카를 끌고 남편 태완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환한 미소로 현자를 반겨주는 태완에 스르르 녹아 내리는 설움들.

현자, 몸이 불편한 태완을 재우고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한다.

집 밖만 나오면 현자에게 어김없이 들이닥치는 시련들.

폐지를 두고 한참 실랑이가 벌어지지만 어째 오늘은 주민센터의 도움으로

의료급여 심사를 받게 되고, 노인 일자리 사업에도 참여하게 된다.

‘선생님, 의료급여 수급지원 자격이 안되세요'

주어진 노인 일자리에서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의료급여 수급 기준 소득을 초과해버린 현자. 울화통이 터진다.

망연히 다시 폐지를 줍는 현자에게 위험천만한 차도로 내려가라는 경찰들.

현자,리어카를 끌고 역주행을 하다가 언덕 경계석에 툭-걸린다. 폐지가 와르르 쏟아진다.

늘 그랬듯 현자를 반겨주는 태완, 하지만 소변을 지린 채이다.

품에 안긴 애처로운 현자의 얼굴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의 시작은 공무원과 할머니의 대화를 보이스 오버로 이어가며 검은 화면만이 가득한 채 1~2분 가량을 소모한다. 마치 실제 할머니와 공무원의 대화를 녹음한 듯 실제적이고 설명적인 대사가 나열된다. 시각적인 요소가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 채 일상의 대화로 이어지는 시작이 답답하게도 느껴지기도 했고 연출에 의아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이러한 연출에 이유를 붙일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현실과 블랙 코미디가 콜라보된 픽션 다큐멘터리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내 현실적이고 답답한 상황이 반복된다. 어머니의 전화를 차갑게 끊어버리는 아들, 할머니의 요구에 "정책이 그래서요." 라는 말 밖에 반복할 수 없는 공무원,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에게 인도에서 리어카를 끌면 벌금이라고 말하는 경찰, 오르막길에서 쏟아져버린 종이 박스들. 그 역경이 극적이진 않지만 현실적인 만큼 더욱 먹먹하고 답답하게 가슴을 울려오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극적이기도 하다. 고작 9천 2백원 때문에 소득 신청을 할 수 없다는 말에는 어이없다는 주연 배우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박스를 쏟아버리고 모든 것이 황망해진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멈춰버리는 연기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상황에서 울고 불고 삶을 저주하는 말을 했다면 이 정도의 여운을 가져다 주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저 황망하고 허무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진실한 인간이 연기를 통해 느껴졌다. 



섹션 소개 출처: 서울노인복지센터 블로그 영화제 섹션 소개글

영화 소개 출처: 서울국제노인영화제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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