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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개돌개 Jun 08. 2024

디즈니의 성공한 흑인 PC서사의 시작과 끝은 이곳이다.

‘애니’와 디즈니 '개구리왕자', 약자 서사의 역설적인 모순에 대한 분석

진정한 자기 성장 서사일까, 대통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사일까? ‘애니’와 개구리왕자

   

뮤지컬 영화 '애니'는 대통합주의와 아메리칸 드림 서사라는 한계점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진 못했다는 아쉬운 점이 내가 가장 좋아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 ‘공주와 개구리’를 보았을 때에는 기존의 디즈니 서사와는 다르게 당차게 주체적으로 자신의 꿈을 향하여 나아가는 티아나의 행위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제목에서부터도 원작인 개구리 왕자가 아닌 공주와 개구리로 주인공은 티아나 라는 점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점 또한 이례적으로 느껴졌다. 이 때문에 어릴 적 나에겐 ‘공주와 개구리’가 진정한 행위의 서사이자 권력이 반전되어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자기 성장 서사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공주와 개구리’를 틀었을 때 나는 묘한 기분 나쁨에 마지막 엔딩 곡이 끝난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수업을 들으며 ’공주와 개구리‘ 서사가 혹여 자기 성장 서사로 둔갑한 아메리칸 드림, 대통합주의적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사는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다.

’공주와 개구리‘의 주인공 티아나는 흑인 저소득층으로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은 후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미국 뉴올리언스에 아버지의 꿈이었던 레스토랑을 차리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티아나의 절친한 친구 샬롯은 부르주아 아버지의 밑에서 평생을 공주님으로 살아오며 사랑과 동화로 가득한 실패 없는 삶을 살아온 백인 여성으로 등장한다. 위와 같은 배경에서 티아나는 거의 다 성공했던 레스토랑 개업에 실패하고 개구리가 되어 나빈 왕자와 모험을 하게 된다. 이후 모험이 끝나며 결국 바라던 것을 찾아내고 사랑과 꿈을 이루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스토리에서 ’공주와 개구리‘가 진정한 행위의 자기성장 서사로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았다.     

 1. 티아나와 나빈이 개구리가 되면서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로 가게 된다. 티아나는 레스토랑이라는 목표를 위해 쉴 세 없이 일하기만 하던 초목표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맞이하게 되고, 모두가 모든 것을 해주던 빈둥거리는 세계만이 있었던 나빈은 몸을 움직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티아나와 나빈은 완전한 반대의 타자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 갈등하기도 하며 격렬하게 마찰한다. 이는 미지의 세계에서 타인과 마찰하며 자신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가게 되는 자기 성장 서사와 닮아 있다.

2. 마마오디가 부르는 Dig a Little Deeper 넘버의 가사 중 “네 자신을 찾으면 필요한 게 보여, 뭘 찾게 될지 모르겠지만 더 깊게 파.” : 티아나가 가지고 있는 레스토랑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아버지에게서 답습된 가족주의적 욕망이었음을 깨닫게 하고 진짜 자신 내면의 이유를 찾도록 의도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 때문에 아직 표면에 머물고 있던 티아나가 더 깊게 파고 더 노력해서 레스토랑을 차리겠다고 하자 마마오디가 그 말이 아니라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3. 피오나는 처음에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레스토랑을 개업하고자 고군분투하였지만 내면으로의 진입을 통해 성장을 한 후에는 세상이 그의 자리를 만들어준다. 이로 인해 레스토랑을 개업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서 찾은 진정한 가치인 사랑과 우정 또한 놓치지 않으며 세상에서 자리를 확실시 한다.     

반대로 이 서사에서 아메리칸 드림 및 대통합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고 느껴진 부분은 아래와 같았다.     

레스토랑을 열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는 티아나에게 샬롯이 찾아와 나빈 왕자를 유혹할 수 있도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한다. 샬롯은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뭉치를 마구 꺼내 티아나에게 안겨주고, 그것을 받은 티아나는 레스토랑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돈이 마련되었다며 순수하게 뛰며 기뻐하는 것. 샬롯의 선한 욕망에서 나온 돈이 티아나의 레스토랑 개업을 가능케 하며 평등에 기여하는 것처럼 나오는 부분.

레스토랑 건물을 다른 사람에게 팔기로 했다는 부동산 업자들을 붙잡으려던 티아나가 나자빠져서 엉망이 된다. 그때 왕자와 춤을 추고 온 샬롯이 티아나를 발견하고 “Oh, poor dear.” 이라고 말하며 티아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공주 옷을 갈아입히며 치장 시켜주는 장면. 초반에 등장하는 티아나와 샬롯 둘 다 공주 옷을 입고 평등하게 보이는 모습과 현재의 전혀 다른 모습의 두 사람이 대비된다. 샬롯이 피오나를 자신과 같은 공주로 치장해준 것은 물론 샬롯의 선한 욕망이었지만 티아나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파란색 드레스처럼 겉모습만 평등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표면적 의미로 보였다.

빌런 파실리에가 티아나를 포섭하기 위해 티아나의 꿈인 레스토랑을 실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유혹하며, “불쌍한 아빠를 생각해봐, 평생 일만 했어. 불쌍한 아빠의 꿈을 이룰 수 있어.” 라고 티아나의 표면적 욕망을 자극한다. 하지만 피오나는 “아빠에게는 사랑이 있었어. 중요한건 놓치지 않았어.” 라고 말하며 자신 내면에서 찾은 진정한 가치가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부분. 이 부분에서 결국 온전히 자신을 위한 욕망 보다는 사랑과 가족애가 무조건적인 선이자 정답이라는 가족주의적 서사의 껍데기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4. 마지막 장면에 샬롯과 샬롯의 아빠를 포함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와 평화롭게 ’Down in New Orleans‘를 메들리로 부르고 뉴올리언스의 화려한 아메리칸 시티 야경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끝나는 부분. 이 부분에서 또한 대통합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 때, ’공주와 개구리‘는 2003년 ’애니‘와 같이 단순히 사랑이 답이라는 대통합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에서 여전히 완벽하게 틀을 깨진 못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고난 끝에 사랑이 찾아온다는 결말은 초창기 디즈니 서사의 고질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후로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흑인과 여성이라는 동일한 마이너한 담론을 가진 주인공 ’모아나‘가 제작되며 온전히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위해 행동하고 사랑 외의 다른 가치로 귀결되는 서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디즈니가 기존의 나약했던 서사로부터 조금은 벗어나 실존하는 성장 서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 또한 해볼 수 있었다.

최근엔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미디어의 시청이 가능한 OTT의 확장으로 대중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타자는 더 많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존의 올드한 획일화된 프레임으로는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디즈니에서는 모아나 이후로도 마이너한 정체성을 가진 유색인종 캐릭터가 만들어지려 시도되고 있지만 그것이 백인남성 기득권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PC주의를 이유로 경영권 싸움을 하고 있는 디즈니의 상황만 보아도 이러한 담론의 서사가 자본주의에게 이용되는 것으로 변질 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화이트 워싱‘이라는 단어에서 ‘블랙워싱’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미디어가 대중을 가스라이팅 한다고 주장하는 아이러니함 또한 대중문화가 맞이할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공주와 개구리’는 대통합주의적 담론에서는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점점 ‘모아나’, ‘위시’와 같은 좋은 자기성장 서사가 등장하고 있는 만큼 이와 같은 아이러니함과 대중성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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