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의 주인
수면 아래의 붉은 눈들은, 증오가 아닌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이무기의 눈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이 저수지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살아온, 늙은 ‘산지기’의 눈이었다. 아니, 산지기였던 존재의 눈.
“저건….”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단단하던 어깨가, 거대한 산맥이 무너지듯 힘없이 내려앉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저건… 나야.”
……!
배 위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절대적인 정적. 박종윤은 자신의 심장이 멎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소나 화면 속, 거대한 뱀의 형체가 끔찍한 진실을 증명하듯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무기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이 산을 지키며 쌓아 올린, 산지기의 ‘영체(靈體)’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영혼은 이 산과 동화되어, 저수지를 지키는 거대한 수호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산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인간.
“말도 안 돼….”
장서린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과학적 이성이, 눈앞의 비현실적인 증언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그럼 어르신은… 지금 살아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까? 잔류사념? 아니면 일종의 홀로그램?”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아는 과학 용어를 끄집어냈지만, 그 어떤 단어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지.”
노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짙은 물안개처럼 희미했다.
“나는 그저, 이 산에 남겨진 ‘기억’일 뿐이야. 내 친구들을 지키겠다는 마지막 약속. 그 지독한 집념이, 이렇게 껍데기를 만들어 잠시 너희 앞에 나타난 게지.”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끝이, 오래된 흑백 사진처럼 희미하게 바래며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힘이 다했구나.”
그의 말이 끝나자, 수면 아래의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지기의 영체는, 이제 화천회의 저주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었다. 본래의 의지는 사라지고, 오직 모든 것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는 파괴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그 거대한 입이, 나룻배를 한입에 삼키기 위해 벌어졌다. 칠흑 같은 아가리 너머로, 수십 년간 쌓인 원혼들의 비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안 돼!”
최민준이 총을 들어 수면을 향해 난사했지만, 총알은 그저 끈적한 어둠 속으로 힘없이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소용없어!”
서화가 외쳤다.
“저건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영혼 그 자체라고요! 저주가 응축된 순수한 악의 덩어리예요!”
그 순간, 박종윤이 태블릿을 향해 소리쳤다.
“서화 씨, 저 영체의 중심! 코어의 위치를 찾아야 해요! 저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이는 ‘핵’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거대한 시스템이라도, 반드시 전체를 컨트롤하는 CPU는 있기 마련이니까!”
그는 소나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시켰다. 화면에, 수많은 데이터 노이즈와 함께, 영체의 내부 구조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중심. 뱀의 심장이 있어야 할 위치에, 다른 모든 곳보다 훨씬 더 짙고 검붉은 에너지 반응이 포착되었다. 마치 거대한 종양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사악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저기다!”
하지만 너무 깊었다. 수십 미터의 물과, 저주받은 영체의 두꺼운 껍질. 그 어떤 공격도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가야지.”
노인이, 산지기의 기억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엽총을 서화에게 건넸다. 복숭아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총신은, 그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나는 이제 힘이 없어. 하지만 너희는 다르지. 너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으니.”
그는 최민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놈들의 뿌리를 뽑아주게, 젊은이. 자네의 그 서슬 퍼런 눈이 마음에 들어.”
그는 장서린을 보았다.
“죽은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네. 이제야 저 아이들도 편히 눈을 감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종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그 희한한 기계, 아주 쓸모가 많구만. 늙은이의 마지막 길을 다 비춰주고.”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기억을, 의지를, 하나의 불꽃으로 응축시켰다. 그의 몸이, 순백의 빛 덩어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양처럼 뜨겁지도, 달처럼 차갑지도 않은, 새벽녘의 여명과도 같은 따스하고 성스러운 빛이었다.
“내 친구들을… 더는 괴롭히지 마라, 이 잡놈들아….”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는 빛이 되어, 스스로 검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오염된 과거를, 자신의 손으로 정화하기 위해.
빛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소리가 없는, 순수한 빛의 폭발이었다. 저수지 전체가, 한낮처럼 밝아졌다. 성스러운 빛의 파동이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수십 년간 쌓인 원혼들의 한을 어루만지고, 화천회가 심어놓은 악의를 태워버렸다. 수면 아래를 맴돌던 거대한 뱀의 형체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 검붉은 몸뚱이 곳곳에, 하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폭발의 충격으로, 나룻배가 뒤집힐 듯이 흔들렸다.
“지금이야!”
서화가 외쳤다. 그녀는 노인이 남긴 엽총을 들어, 박종윤이 가리키는 핵의 위치를 겨누었다. 그녀의 눈에, 파수꾼의 모든 집중력이 모였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세 명의 동료와 한 늙은 산지기의 마지막 염원이 함께하고 있었다.
탕-!
다시 한번, 벼락 같은 총성. 복숭아 나뭇가지 탄환이, 빛의 속도로 물속을 꿰뚫고 날아갔다. 그것은 정확히, 빛의 폭발로 약해진 영체의 균열 속으로 파고들어, 검붉은 핵의 중심에 박혔다.
정적.
모든 것이, 멈췄다. 뱀의 형체는 움직임을 멈췄다. 수면을 떠돌던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들이,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저주가 풀리고, 그들은 다시 평범한 죽은 자들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거대한 영체는. 수천, 수만 개의 은백색 나비가 되어.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산지기의 영혼이자, 수십 년간 이 저수지를 떠돌던 구천리 마을 사람들의 영혼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지박령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안식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나비 떼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맑고 청아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기는 마지막 감사 인사였다.
네 사람은, 넋을 잃고 그 장엄하고 슬픈 광경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은백색 나비 떼는, 마치 강처럼 흘러. 달을 향해, 사라져갔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저수지에는, 다시 태고의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의 불길한 정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평화로운 침묵이었다. 저수지의 물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었다. 달빛을 온전히 비추는, 맑은 거울이 되어 있었다.
“이제….”
최민준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종탑으로 가야지.”
그들은 다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강의 주인이 열어준, 마지막 길을 따라서. 나룻배는, 고요한 수면 위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은백색 나비 떼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성스러운 여운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저수지의 물은 더 이상 원혼들의 눈물을 담은 검은 강이 아니었다. 달빛과 별빛을 온전히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말없이, 노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 벌어졌던 장엄하고 슬픈 사투가, 마치 한바탕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산지기의 희생.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의 해방. 그것은 승리였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그들은 이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이었던 화천회의 저주를 끊어내야만 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박종윤이 태블릿을 보며 말했다. 소나 화면 속, 거대한 건축물의 형체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수몰된 마을의 중심. 낡은 종탑이었다.
배가 멈춰 선 곳. 수면 위로, 종탑의 첨탑 끝부분이 섬처럼 솟아 있었다. 녹슨 십자가는 세월의 흔적을 이고, 묵묵히 밤하늘을 향해 있었다. 물 아래를 내려다보자, 달빛에 비친 거대한 탑의 그림자가 아득한 깊이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치 수면 아래,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처럼.
“이제부터는… 직접 들어가야 합니다.”
서화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낡은 가방에서, 방수 처리된 작은 등불 여러 개를 꺼냈다. 그 안에는, 상어의 간 기름으로 만든 초가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파수꾼의 등불이었다.
“문제는….”
장서린이 수심을 측정하며 말했다.
“입구가 수심 10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 탑 안은, 수십 년간 물이 고여 있었을 겁니다. 평범한 잠수 장비 없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서화는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네 사람에게 한 방울씩 나누어주었다. 인어의 눈물이라고 전해지는, 신비로운 푸른색 액체였다.
“이걸 마시면, 물속에서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효는 길지 않아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네 사람은 결심한 듯, 액체를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폐부가 얼음처럼 시원해지는 기묘한 감각. 그들은 더 이상 공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이, 그들의 새로운 공기가 된 것이다.
“가죠.”
최민준이 먼저, 차가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뒤를 이어, 장서린과 박종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화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은, 또 다른 우주였다. 소리는 사라지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서화가 켠 등불의 희미한 빛만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일한 길잡이였다. 그들의 눈앞에, 수몰된 종탑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세월의 흐름 속에, 탑의 벽면은 온통 물이끼와 수초로 뒤덮여 있었다. 물고기 떼가, 마치 유령처럼 창문 안팎을 유영하고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풍경. 그들은 탑의 입구를 향해 헤엄쳐 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육중한 나무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단순한 자물쇠가 아니었다. 문 전체에, 검붉은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쇠사슬이 뱀처럼 감겨 있었다. 쇠사슬의 중심에는, 기이한 형태의 부적이 붙어 있었다.
“화천회의 결계….”
서화가 부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가두는, 이중 봉인이에요.”
그녀가 옻칠한 나무 부적을 꺼내 쇠사슬에 가져다 대자,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돼….”
“이건 제 힘만으로는….”
그때였다. 네 사람의 등 뒤, 깊은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떠올랐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었다. 실체를 가진, 살아있는 존재들이었다. 온몸이 검은 비늘로 뒤덮여 있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반인반어(半人半魚)의 괴물. 물속에 잠든 원혼들의 시체를 먹고, 화천회의 저주에 의해 변이된, 끔찍한 수호자들이었다.
크르르르릉…
괴물들이 내는 소리는, 물을 통해 뼈를 직접 울렸다. 그들은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앞은 막혔고, 뒤는 포위되었다. 수중이라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젠장!”
“내가… 막겠습니다.”
서화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방어 결계를 펼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 서린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눈앞의 현상을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논리가 그녀의 심장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거대한 고동 소리 앞에서 힘을 잃고 있었다.
‘아니야.’
과학자로서의 그녀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받아들여라.’
그녀의 핏줄 속에서, 수십 대를 이어져 내려온 무당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너는 저들과 같은 존재다. 죽은 자들의 왕. 산 자들의 경계에 선 자. 이제 그만 부정하고, 너의 진짜 눈을 뜨거라.’
“싫어….”
장서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 힘을 거부했다. 평생을 바쳐, 이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도망쳐왔다.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하고, 신당을 뛰쳐나왔던 그날. 그녀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왜? 내가 왜 그렇게까지, 이 힘을 증오했던 거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이 힘을 거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그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을.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도려내진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도망쳤다는 ‘사실’은 기억했지만, 왜 도망쳤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감정’의 핵이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 눈도 코도 입도 없던, 삿갓 아래의 어둠. 뱃사공.
‘가장 아프거나, 가장 행복했던. 너를 지금의 너로 만든, 가장 선명한 기억의 조각.’
그녀가 뱃사공에게 지불한 대가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던, 가장 아프고 선명했던 저항의 기억. 이제, 그녀에게는 이 힘을 거부할 이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눈앞의 현실뿐이었다. 동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들을 구할 힘이 있었다. 그녀의 과학은 무력했다.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
장서린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나였지.”
그녀는 스스로, 둑을 무너뜨렸다. 그녀가 평생을 부정하고 억눌러왔던, 무당의 피. 죽은 자를 부리고, 산 자를 저주하며, 세상의 이치를 뒤트는 강신무(降神巫)의 힘이, 마침내 그녀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주변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아니, 서화씨. 기다려요. 모두… 눈 감고 귀 막아요.”
그녀는 무기를 내려놓고, 대신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푸른 물속으로 아름답게 퍼져나갔다.
“박사님! 지금 무슨…!”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당신들이 봐서는 안 될, 나의 ‘세상’이니까... 모두 눈감고 귀막아요. ”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잊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 자신이 부정해왔던, 무당의 피를. 스스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수꾼의 주문과는 다른, 더 원초적이고 거친. 죽은 자를 부르고, 산 자를 저주하는, 금단의 언어였다. 그녀의 피 냄새를 맡고,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괴물 하나가. 그녀의 코앞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채. 스스로, 자신의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괴물의 비명은, 물속에서 소리가 아닌 충격파가 되어 퍼져나갔다. 동료의 끔찍한 자해를 목격한 다른 수호자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붉은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더 이상 굶주린 살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눈앞의 여자가, 자신들보다 더 깊고, 더 오래된 어둠에 속한 존재라는 것을.
“저게… 대체….”
최민준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장서린.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거대한 폭풍우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금단의 언어는, 단순한 주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물속에 잠든 모든 죽은 자들의 원념을, 자신의 의지 아래 굴복시키는 명령이었다. 수십 년간 이 저수지를 떠돌던 수살귀들. 산지기의 희생으로 안식을 찾지 못하고 남겨진, 가장 악독한 원혼들이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물속의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크르르… 크르르르…
화천회의 수호자들은, 사방에서 조여오는 새로운 위협에 불안하게 몸을 떨었다. 그들은 이제 사냥꾼이 아니었다. 더 거대한 포식자들의 사냥터 한가운데에 갇힌, 먹잇감이었다.
“지금이야!”
장서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텅 빈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눈으로, 이 세상의 이면을 보고 있었다.
“문을… 열어!”
그녀의 명령은, 동료들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부린 수십, 수백의 원혼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창백한 손들이 나타나, 종탑의 문을 감싼 검붉은 쇠사슬을 붙잡았다. 화천회의 저주와, 이 땅의 토착 원혼들의 한(恨)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쇠사슬이 비명을 지르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결계가 약해지고 있었다.
“서화 씨!”
박종윤이 외쳤다.
“지금이에요!”
서화는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남은 파수꾼의 힘을 옻칠한 나무 부적에 집중시켰다. 그녀가 부적을 쇠사슬의 중심, 화천회의 문양이 새겨진 곳에 가져다 대자.
콰직-!
마침내, 수백 년 묵은 나무 문이 안쪽으로 부서져 내리며, 어두운 입구를 드러냈다. 길이, 열렸다.
“들어가요! 빨리!”
최민준이 앞장서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박종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서화는 마지막으로, 장서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수백의 원혼들과 수십의 수호자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끔찍한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박사님! 같이…!”
“먼저 가.”
장서린의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겹쳐진, 기이한 합창이었다.
“이 잔치는… 내가 끝내고 가지.”
서화는 이를 악물고, 종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부서진 문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다시 닫혔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종탑의 내부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空洞)이었다. 물은 바닥에만 얕게 고여 있었고, 중앙에는 위층으로 향하는 낡은 나선형 나무 계단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었다. 벽면에는, 곰팡이와 물이끼 사이로 희미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마을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섬겼던 ‘그것’에 대한 기록.
“이 그림은….”
박종윤이 등불로 벽을 비추었다. 벽화에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뱀에게 제물을 바치고, 풍요를 기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의 끝으로 갈수록, 뱀은 점점 더 탐욕스러워져, 마침내 마을 전체를 집어삼키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구천리 마을은….”
서화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사신(邪神)을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풍요를 얻는 대가로, 자신들의 영혼을 바쳤던 거예요. 그리고 화천회는, 그 사신을 다시 깨워 자신들의 저주를 위한 ‘심장’으로 삼은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뎅- 바로 머리 위에서. 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사악한 소리. 천장이 울리고, 먼지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세 사람은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선형 계단의 가장 꼭대기. 종이 매달려 있는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야….”
“왔느냐….”
“나의 새로운… 제물들이여….”
그리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시체 수십 구를, 붉은 실로 꿰매어 만든. 끔찍한 ‘누더기’와도 같은 형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