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제록 (禁祭錄)] - 64화

새로운 왕, 낡은 흉터

by 돌부처

싸움은 끝났지만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한지운의 희미한 미소는 승자의 여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자의 서늘한 결의였다.


서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깊고 고요한 비취색 눈동자였다. 그 안에는 그녀가 알던 냉소적인 학자 한지운과 그녀를 짓눌렀던 오만한 왕이 함께 있었다. 두 개의 존재가 이제 하나의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에게 닿기 직전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한지운이 아니었다.


“일어나라, 파수꾼.”


지운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위압적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는 서화의 영혼까지 닿지 않았다.


“지운아….”


박종윤이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기쁨과 함께 깊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돌아왔구나… 정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지운이 그를 돌아보았다.


“새로 태어난 것이지.”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붓을 내려다보았다. 혼돈의 바다에서 그가 직접 ‘기록’하여 창조해 낸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붓이었다. 그것은 이제 그의 일부였다.


“이 낡은 감옥의 ‘기록’은 바로잡았다. 하지만 아직 여섯 개의 흉터가 남아있지.”


그의 말이 끝나자 닫혀 있던 감옥 문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월하 연구회였다. 지산 노인의 연락을 받은 그들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늦었군.”


지운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피투성이의 최민준, 탈진한 장서린, 그리고 넋이 나간 박종윤. 그들은 승리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잃었다.


“이제 어떡할 건가.”


최민준이 어깨의 고통을 참으며 물었다.


“우리는 이제 세상의 법으로는 쫓기는 몸이야.”

“법이라.”


지운의 입가에 왕의 미소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법은 이제부터 내가 만들 것이다.”


그는 서화에게서 시선을 떼고 감옥 밖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월하의 조직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세 사람은 말없이 그를 따랐다. 박종윤은 친구의 낯선 뒷모습을 보며 희망과 함께 깊은 불안을 느꼈다. 장서린은 자신의 과학이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신화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민준은 자신이 쫓던 용의자가 이제 자신이 따라야 할 유일한 ‘법’이 되어버렸다는 아이러니를 곱씹었다.


서화는 홀로 그들의 뒤에 남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렸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한지운을 구했지만 동시에 그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이제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고독한 신이 되어버렸으니까.


감옥 밖에서 월하의 요원들이 지운의 앞을 막아서며 경계했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연화와 돌쇠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누구지?”


연화가 날카롭게 물었다.


“한지운 박사인가, 아니면….”

“나는 기록자다.”


지운이 짧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붓을 들어 허공에 글자를 썼다.


‘길(道)’.


그러자 그들의 눈앞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다음 ‘문’으로 향하는 황금빛 길이 열렸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지운의 비취색 눈동자가 밤의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내가 이 전쟁의 왕이다.”


선언은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한지운의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그의 성대를 빌려 터져 나온 그 소리에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공기가 납처럼 무거워졌고 감옥 안의 모든 소음이 그 목소리 아래 굴복하듯 멎었다. 월하의 요원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어떤 이는 무릎을 꿇을 뻔했고 어떤 이는 경외감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경찰이 쫓던 평범한 학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서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군주의 위엄, 천지를 호령하는 패기(霸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단검 손잡이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감각, 수많은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단련된 그녀의 본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상대해 온 어둠과는 격이 달랐다. 저것은 혼돈이 아닌 완벽한 질서였다.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거대한 의지 그 자체였다.


지운은 자신을 둘러싼 월하의 요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는 붓을 들어 허공에 길을 그렸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황금빛 입자들이 모여들어 찬란한 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빛의 다리가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박종윤은 경악했다. 길을 이루는 것은 빛이 아니라 수억 개의 문자, ‘기록’들이었다. 그는 그 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박종윤과 최민준, 그리고 장서린이 망설이듯 따랐다. 그들은 이제 친구도 용의자도 아닌 미지의 왕을 따르는 첫 번째 신하들이었다. 최민준은 자신의 손에 들린 권총이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장서린은 눈앞의 현상을 과학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했다. 박종윤은 자신의 친구가 저 빛나는 길 너머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깊은 불안에 휩싸였다.


“잠깐.”


그들이 길에 오르기 직전 연화가 그들을 막아섰다. 그녀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유일하게 왕의 패기에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이전의 경멸 대신 미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방식이 있어. 지산 어르신의 명 없이는 당신을 따를 수 없다.”

“명이라.”


지운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연화를 돌아보았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가 그녀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 실패했던 임무들, 동료를 잃었던 아픔까지 모두 읽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너희의 ‘명’은 패배를 위한 것인가?”


그가 물었다.


“너희는 수십, 수백 년간 그림자 속에서 싸워왔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화천회는 더욱 강해졌고 너희는 언제나 한발 늦었다. 썩어가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이 너희의 방식인가?”

“……!”


연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뼈를 때리는 진실이었다. 그녀의 자존심에 깊은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승리하기 위해 왔다.”


지운이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가 황금빛 길과 공명하며 신탁처럼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나는 저들의 심장을 향해 가장 빠르고 가장 곧은 길을 갈 것이다.”


그는 다시 황금빛 길을 가리켰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따를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낡은 패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그때 돌쇠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지운의 앞에 서서 묵묵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거대한 몸이 만드는 그림자가 바닥에 경건하게 드리워졌다.


“대장!”


연화가 놀라 외쳤다.


“월하의 기록에 따르겠습니다.”


돌쇠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운의 눈을 보지 않고 지운의 몸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기록은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왕이 나타나 흩어진 그림자들을 하나로 모을 것이다’라고.”


그는 고개를 들어 지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그 예언의 주인이라면 저희는 당신의 검과 방패가 되겠습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 남자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단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것은 복종의 의미였다. 지운은 말없이 그들을 지나쳐 황금빛 길 위로 올라섰다. 그의 뒤를 네 명의 동료와 수십 명의 월하 요원들이 따랐다. 흩어져 있던 그림자들이 마침내 하나의 군대가 되어 새로운 왕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감옥 입구에 홀로 남은 서화는 그 모든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기쁨도 희망도 없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깊고 시린 슬픔만이 감돌았다. 그는 돌아왔지만 자신이 기다리던 ‘한지운’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너무나도 멀고 높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기억을 잃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선택한 저 ‘왕의 길’의 끝에는 구원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저 길은 승리를 향하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버리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운이 되살려준 생명의 온기. 이 온기만이 그가 한때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존재가 되든 자신만큼은 그의 마지막 인간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모두가 왕을 따를 때 자신은 한지운이라는 한 남자를 기다리겠다고. 설령 그 끝에서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 그를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해도….


그녀는 마지막으로 황금빛 길이 사라진 허공을 한번 돌아보고 차가운 밤의 어둠 속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길은 현실의 공간을 무시했다. 그것은 지맥과 지맥을 잇는 가장 빠르고 가장 위험한 통로, 기록자만이 열 수 있는 왕의 길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으로 수백 년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쟁의 함성, 왕조의 흥망, 그리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백성들의 삶. 월하의 요원들은 경외와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새로운 왕의 뒷모습을 따랐다. 그들은 평생을 그림자 속에서 싸워왔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권능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주술이 아니었다. 세상을 다시 쓰는 창조의 영역이었다.


“여긴….”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 박종윤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서대문형무소가 아니었다. 그들은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 타워의 최상층 전망대에 서 있었다. 사방의 유리창 너머로 수천만 개의 불빛이 마치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욕망의 바다였다.


“어째서… 이곳으로….”


최민준이 경계하며 물었다.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의 권총으로 향했다. 지운은 대답 대신 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밤의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도시. 하지만 그의 비취색 눈동자에는 다른 것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도시 전체를 거대한 바둑판처럼 내려다보며 그 위를 흐르는 거대한 기운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푸른 생명의 빛과 잿빛 절망, 그 모든 것을 좀먹고 있는 거대한 검붉은 핏줄, 오염된 지맥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지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놈들은 감옥 안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다. 감옥 그 자체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은 게지.”


그의 말이 끝나자 박종윤의 태블릿에 새로운 데이터가 떠올랐다.


“말도 안 돼….”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화면에는 서울 서북부의 지맥 흐름을 시뮬레이션한 3D 지도가 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를 중심으로 서울 서북부 전체의 지맥이… 하나의 거대한 진(陣)을 형성하고 있어요. 마포, 은평, 종로 일대의 모든 영맥이 형무소의 한 점으로 흡수되고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덫처럼.”

“오카다의 역할은 문지기가 아니었군.”


최민준이 이를 갈았다.


“그놈은 감옥에 깃든 수천의 원념을 증폭시켜 서울의 지맥 전체를 오염시키는 ‘독샘’이었던 게야. 도시 전체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고 있었던 거야.”


지운은 말없이 품에서 『금단의 기록』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거문(巨門)’의 별자리가 그려진 페이지 위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의 손끝에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나와 낡은 종이 위에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선이 아니었다. 수백 년 전의 잊힌 길, 지금은 사라진 하천, 오래된 사찰의 터. 한상현의 기록 위에 한지운의 기록이 덧씌워지며 완벽한 해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박종윤.”


그가 명령했다.


“이 좌표들을 너의 그 ‘눈’으로 전군에 알려라.”


화면에 떠오른 것은 서울 서북부 곳곳에 흩어진 일곱 개의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낡은 수도국지,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피가 흘렀던 이름 없는 고개,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공동묘지 터…. 모두 현대의 풍경 아래 깊은 슬픔을 간직한 곳들이었다.


“저것들은 진(陣)을 유지하는 ‘혈(穴)’이다. 월하의 무리들에게 저 혈들을 동시에 파괴하라고 명해라. 뱀의 몸뚱이를 먼저 끊어내야 그 독이 더 퍼지지 않을 터이니.”

“하지만… 당신은….”

“짐은 저들의 심장을 직접 칠 것이다.”


지운의 눈이 유리창 너머 서대문형무소를 향했다.


“뱀을 잡으려면 그 머리를 먼저 쳐야 하는 법이지.”


그는 다시 허공에 붓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황금빛 길이 아니었다. 그의 발밑에 검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문’을 만들어냈다. 왕의 권능, 공간을 지배하는 힘이었다. 문 너머로는 붉은 벽돌의 감옥 복도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여기서 나의 눈과 귀가 되어라.”

“최민준, 연화와 함께 월하의 칼날이 되어 화천회의 그림자를 베어라.”

“장서린, 죽은 자들의 기록을 읽고 승리로 향하는 길을 찾아라.”

“박종윤, 너는 이 모든 길을 열고 지배해라.”


그는 각자에게 사명을 내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너희의 쓸모를 증명해 보아라.”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검푸른 문 너머로 사라졌다. 남겨진 세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새로운 왕의 첫 번째 전쟁, 그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한편, 홀로 감옥을 빠져나온 서화는 밤의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돈으로 가득했다. 지운은 돌아왔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를 믿어야 하는가.


그녀가 낡은 공중전화 부스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따르르릉- 죽어있던 전화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망설이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구나, 나의 아이야.”


수화기 너머로 낯익지만 한 번도 직접 들어본 적 없는 깊고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산(知山)이었다.


“어르신….”

“길을… 잃었느냐.”

“모르겠습니다.”


서화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약하게 떨렸다.


“제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돌아왔지만 너무나도 낯섭니다.”


“왕의 길과 너의 길은 다르다.”


지산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연륜이 담겨 있었다.


“왕은 부러뜨리려 하지만 너는 이어야만 한다. 그는 역사를 심판하려 하지만 너는 그 역사의 슬픔을 보듬어야만 해.”

“기억하거라, 파수꾼의 후예여.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은 빛이 태어나는 법.”

“그의 마지막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서화의 눈앞에 환영처럼 하나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뒤뜰. 수많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았던 작은 쪽문. 그 문을 통해 한 줌의 햇빛이라도 더 보려 했던 그들의 마지막 염원. 그리고 그 문을 지키고 서 있는 오래된 미루나무 한 그루.


“때가 되면….”


지산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 나무가 너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왕이 보지 못하는 파수꾼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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