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청춘의 가장 뜨거운 한복판에서 내디뎠던 첫걸음은, 잠시 자유로운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갔다가 운명처럼 다시 이곳으로 이어졌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 모든 것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게만 느껴지던 그곳에서, 저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 아주 작은 부품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지, 혹은 버텨낼 수 있을지 가늠할 겨를도 없이, 그저 눈앞의 파도를 넘는 데에만 급급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문득 15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는 어느 날, 오래된 메일함을 열어보았습니다. 검색창에 '퇴직인사'라는 단어를 입력하자, 잊고 있던 시간의 흔적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함께 웃고 때로는 부딪히며 동고동락했던 동료와 선후배들의 수많은 작별 인사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마다의 사연과 새로운 꿈을 담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니, 어디선가 복사해 붙인 듯 상투적인 문구들마저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그 익숙한 문장들 속에서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시렸습니다.
함께 밤을 새우던 프로젝트, 복도에서 나누던 시시콜콜한 농담, 격려와 질책이 오가던 회의실의 풍경.
지금도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았을까 싶은 그리운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20대의 푸르렀던 어느 날, 세상을 다 가질 듯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인연은, 어느덧 불혹이라 불리는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해결 불가능해 보이던 문제를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풀어냈을 때의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고, 단 하루의 마감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던 숨 막히는 치열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만드는 기술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했던 낭만도 존재했습니다.
겪어보기 전 막연히 상상했던 거대 조직의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너무나도 인간적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나가는 역동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마치 고요한 수면 아래 거대한 해류가 흐르는 바다와 같았습니다. 몇 달이고 지지부진하던 일이 단 며칠 만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마무리되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과정으로 일이 흘러가는 듯하다가도 결국에는 믿을 수 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진행되지?'라며 비효율에 고개를 젓다가도, '결국 이렇게 일을 해내는구나'라며 그 저력에 감탄했던 순간들이 셀 수 없이 교차합니다.
물론, 모든 순간이 좋았던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불태운 듯한 번아웃에, 이제는 정말 안녕을 고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수없이 마음속 사직서를 던졌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이룰 것도, 배울 것도 없다는 자만과 체념이 뒤섞인 감정으로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서기를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마치 땅이 꺼진 자리에 새로운 샘이 솟듯,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새로운 도전 과제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언젠가 나도 동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날이 오겠지, 막연히 그날을 상상하다가도, 이력서를 새로 쓰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다시 한번 나를 증명해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면 이내 고개를 젓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일지도, 혹은 지난 15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깊은 관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5년.
회사로부터의 거창한 축하는 없지만, 묵묵히 시간의 강을 건너온 스스로에게 작은 축하와 위로를 건네봅니다. 잘 버텼다고, 그리고 꽤 잘해왔다고.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성공과 실패의 기억들을 자양분 삼아, 저는 또 어떤 이야기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될까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