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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 뒤에 숨은, 벌거벗은 당신에게

나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

by 돌부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입사를 준비하며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스스로에게 던졌을 질문입니다. 면접관 앞에서도, 자기소개서 위에서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그럴싸한 답을 내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저는 열정적인 도전자입니다"

"저는 소통을 중시하는 조율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수식어로 자신을 포장하여 이 좁은 문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사원증을 목에 거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무실의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립니다. 조직은 더 이상 당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오직 당신의 '기능'입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엑셀을 잘 다루는 김 대리이거나, 영어를 잘하는 박 사원, 혹은 야근을 마다하지 않는 신입일 뿐입니다.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당신은 규격화되고 번호가 매겨집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조직이 부여한 '기능'을 자신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순간, 혹은 자신이 가진 '과거의 배경'만을 유일한 정체성으로 삼으려는 순간, 우리는 가장 취약한 상태가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목을 매게 되고, 누군가 규정해 주는 대로 살아가게 되며, 결국에는 빌런들의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 되거나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할 '나의 뿌리'와 '진짜 정체성'에 대해 아주 긴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펜실베이니아의 한 제지 회사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평소에도 유독 인정 욕구가 강하고, 자신이 명문대 출신임을 시도 때도 없이 과시하려 드는, 전형적인 '배경 집착형' 인물입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겉돌며 늘 주목받고 싶어 안달이 난 그에게 어느 날, 인생을 바꿀만한(이라고 그 혼자 믿는) 뉴스가 당도합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영부인 미셸 오바마와 먼 친척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소식입니다.


이 뜬금없고 희미한 가능성 하나에, 그의 태도는 180도 돌변합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특별한 혈통을 가진 존재라도 된 양 우쭐거리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흑인 문화를 공부한답시고 사무실에서 요란을 떨고, 동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새로운 뿌리'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나 성과가 아닌, 타인과의 혈연관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 소동의 결말은 잔인한 블랙코미디입니다. 조사 결과, 그는 미셸 오바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이죠. 자신의 뿌리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려던 그의 시도는,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만을 드러낸 채 동료들의 비웃음 속에서 비참하게 막을 내립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내면의 알맹이가 아닌, 외부의 간판이나 껍데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가? 그리고 그 껍데기가 벗겨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비단 TV 속의 과장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한국의 대기업, 특히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나 경력직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풍경을 너무나 자주 목격합니다.


입사 초기의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동아줄'을 찾습니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선택하는 동아줄은 바로 '과거의 간판'입니다.


"제가 S대 출신인데..."

"제가 전 직장에서는 이런 큰 프로젝트를 했었는데..."

라며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배경을 드러냅니다.


물론 과거의 성취는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회사라는 현재진행형의 전장(戰場)에서, 과거의 훈장은 유효기간이 지난 영수증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 간판에 집착할수록, 동료들에게는 '잘난 척하는 사람' 혹은 '과거에만 사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입니다.


더 큰 문제는 '라인 타기'라는 이름으로 변질된 정체성 찾기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 승부하기보다, "어느 임원과 같은 고향이다", "팀장님과 같은 학교 후배다"라는 학연, 지연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인맥 관리'라고 포장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빈약한 내면을 '배경'이라는 포장지로 감추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시트콤 속 주인공이 '미셸 오바마'라는 허상을 좇다 무너졌듯, 조직 내의 '라인'이나 '간판'에 의지해 쌓아 올린 정체성은 사상누각입니다. 임원이 바뀌고, 팀장이 전배를 가면 그들의 정체성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립니다. 빌딩을 짓지 않고 간판만 화려하게 단 가게는, 태풍이 불면 간판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법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인정'에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상사가 나를 인정해 줄까?"


이 질문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순간, 당신은 빌런들이 가장 다루기 쉬운 먹잇감이 됩니다.


시트콤에서 주인공의 동료들은 그가 헛된 망상에 빠져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할 때,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거나 말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뒤에서 키득거리며 그 상황을 즐기고, 심지어는 거짓 정보를 흘려 그를 더 큰 망신살로 밀어 넣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주인공은 동료가 아니라, 무료한 사무실 생활의 '광대'일뿐입니다.


현실의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 욕구에 굶주린 사람에게 빌런들은 '칭찬'이라는 독이 든 사과를 건넸습니다.


"역시 김 대리밖에 없네. 이번 일도 김 대리가 좀 맡아주면 안 될까?"
"자네는 우리 팀의 미래야. 그러니까 (주말에 나와서) 이것 좀 처리해 줘."


자신의 기준이 없는 사람은 이 달콤한 말에 취해, 부당한 업무를 떠안고, 자신의 삶을 갈아 넣으며, 결국에는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빌런들의 편의를 위해 소모되는 '도구'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노예 계약입니다. 당신은 '인정'이라는 가상의 화폐를 얻기 위해, 당신의 시간, 건강, 그리고 자존감이라는 실질적인 자산을 지불하고 있는 셈입니다. 타인의 평가를 내 정체성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한, 당신은 영원히 그들의 눈치를 보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혼란스러운 정글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짜 '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지난 15년의 경험을 통해, 나를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업무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의 완벽한 분리입니다.


많은 직장인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회사에서의 평가를 내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으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라고 자책하고,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내 인생은 망했어"라고 절망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틀렸습니다.


회사가 평가하는 것은 당신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수행한 '업무'입니다. 이 둘을 분리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퇴근할 때 사원증을 벗어두듯, 회사의 평가와 감정도 사무실 책상 위에 두고 나와야 합니다.


"오늘 업무에서 실수를 했네. 내일은 고쳐야지." 이것은 건강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나는 실수 투성이 인간이야." 이것은 자기 파괴입니다. 업무적 자아는 비즈니스의 도구일 뿐, 당신의 본질을 침범할 수 없도록 단단한 벽을 세우십시오.


둘째, '배경'이 아닌 '역량'으로 나를 정의하는 언어를 갖는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OO대학 나온 OOO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가장 게으른 정의입니다. 과거의 배경을 걷어내고, 현재의 '무기'로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복잡한 데이터 속에서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분석가입니다."
"저는 갈등 상황에서 최적의 합의점을 도출해 내는 커뮤니케이터입니다."
"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디테일을 챙겨 완성도를 높이는 마감의 귀재입니다."


나만의 핵심 역량을 구체적인 언어로 정의하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브랜드가 됩니다. 빌런들이 당신을 '어느 학교 출신', '누구 라인'으로 재단하려 할 때, 당신은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라는 정체성으로 그들의 프레임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간판은 떼어질 수 있지만, 실력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당신만의 뿌리입니다.


셋째, 타인의 인정이 아닌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트콤 속 주인공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가치 판단을 전적으로 타인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당신만의 '내면의 성적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는가?'
'나는 내가 정한 원칙을 지키며 일했는가?'
'나는 동료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를 보였는가?'


상사가 칭찬하지 않아도, 내가 내 기준에 부합했다면 스스로를 칭찬해 주십시오. 반대로 상사가 칭찬하더라도, 내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채찍질하십시오. 평가의 주권(主權)을 타인에게서 되찾아와 나에게로 가져오는 것. 이것이야말로 멘탈이 강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나를 인정할 때, 타인의 인정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보너스'가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피스 빌런즈: 콘크리트 정글의 법칙>을 통해 조직의 기묘한 환영 의식을 목격했고, 리더의 책임 회피와 사내 정치의 비열함을 배웠으며, 일과 놀이의 경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혼돈 속에서 '나'라는 중심을 잡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다시 한번 거울을 보십시오.

입사 첫날, 어색하고 불안했던 당신의 표정은 이제 조금 달라져 있습니까?


정글은 여전히 위험합니다. 빌런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앞으로 더 강력하고 교활한 적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압니다. 그들이 보내는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공격 뒤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거친 파도 속에서 당신이 지켜야 할 단 하나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당신은 누군가의 후배, 누군가의 부하직원이라는 명찰 뒤에 숨은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역량으로 무장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단단한 '플레이어'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이제 우리는 더 복잡한 게임의 규칙이 지배하는, 더 깊숙한 정글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곳에는 당신의 땀과 노력을 숫자로 환산하려는 냉혹한 계산기와, 그 숫자를 조작하려는 검은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정글의 입구를 무사히 통과한 생존자니까요.


계속해서 함께 걸어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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