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뒤에 숨은 진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질 즈음, 대한민국의 사무실에는 일 년 중 가장 기묘하고도 서늘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송년회의 들뜬 분위기 아래, 수면 밑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바로 '고과 시즌'입니다.
평소에는 "우리는 가족"이라며 어깨를 두드리던 팀장님의 눈빛이 계산적으로 변하고, 동료들은 서로의 모니터를 힐끗거리며 자신이 1년 동안 해온 일들을 엑셀 시트에 채워 넣기에 바쁩니다. S, A, B, C, D. 혹은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단 하나의 알파벳이나 숫자가 당신의 지난 1년, 365일의 시간, 수천 시간의 야근, 그리고 당신이라는 사람의 가치를 규정짓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평가는 겉으로는 '성과에 대한 객관적인 측정'이라는 탈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겨내면, 그곳에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인정 욕구, 권력을 쥔 자의 비겁함, 한정된 자원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 공학이 뒤엉킨 뜨거운 용광로가 끓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평가 앞에서 작아질까요? 그리고 리더들은 왜 그토록 평가를 어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것일까요?
이번 화에서는 시트콤 <오피스>의 한 에피소드와 한국 대기업의 적나라한 현실을 오가며, 이 잔인한 '평가 게임'의 법칙을 해부해보고자 합니다.
펜실베이니아의 제지 회사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에는 '업무 평가' 날의 풍경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그려집니다.
이 지점의 리더는 '평가'라는 행위 자체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직원들의 업무 능력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피드백을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직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상사'이자 '사랑받는 친구'로 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평가라는 칼자루를 쥐고도, 그것을 휘두르지 못해 쩔쩔맵니다.
그는 1:1 면담을 위해 사무실을 꾸미고, 마치 데이트를 준비하듯 들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직원이 들어오면, 업무 이야기는 뒷전입니다. 그는 "자네는 우리 지점의 분위기 메이커야", "자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와 같은, 듣기에는 좋지만 영양가는 하나도 없는 감상적인 칭찬들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다 문득, 본사의 지침이나 실제 실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쁜 점수를 줘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는 최악의 수를 둡니다. 바로 '남 탓'입니다.
"나는 자네한테 최고 등급을 주고 싶었어. 정말이야. 그런데 본사의 그 꽉 막힌 인사팀 녀석들이..."
"내가 다 싸워봤는데, 이번엔 어쩔 수가 없더군. 알잖아, 회사가 어려운 거."
그는 비겁하게 시스템 뒤에 숨습니다. 직원 앞에서는 '너를 지켜주려다 실패한 비운의 리더'를 연기하며, 자신의 무능과 비겁함을 '동지애'로 포장합니다. 직원은 혼란스럽습니다. "팀장님은 나를 인정해 주는데, 회사가 문제구나."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평가의 최종 권한과 책임은 리더에게 있습니다. 그가 싸우지 않았거나, 싸울 능력이 없었거나, 혹은 애초에 당신을 위해 싸울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 가관인 것은, 그가 '건의함'을 열어보는 장면입니다. 직원들은 익명으로 리더에 대한 불만과 개선 사항을 적어냈습니다.
"지점장이 너무 산만해서 업무에 방해가 된다"
"회의 시간이 너무 길다"
뼈아픈 피드백들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그는 이 피드백을 수용하는 대신, "이건 누가 쓴 거야? 짐이지? 농담도 참 짓궂네"라며 웃어넘기거나, "이건 나에 대한 질투야"라며 현실을 부정합니다.
그는 타인을 평가할 자격은 즐기면서, 타인으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거부합니다. 그는 '성장'을 위한 고통을 감내할 용기가 없는, 그저 덩치만 커진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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