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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뇰레의 별빛 노래

The Blind Man of Bagnolet

by 돌부처

The Blind Man of Bagnolet, from "The Complete Works of Béranger" | 작가: J. J. Grandville



바람에 먼지와 마차 바퀴 자국이 뒤섞여 거리를 따라 흘러가던 어느 늦은 오후였다.


파리 변두리 바뇰레 마을 초입, 오래된 벽돌 담장을 따라 난 좁은 길목에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낡은 군복 위에 색이 바랜 외투를 걸치고, 왼손엔 주름진 모자를, 오른손엔 마디 굵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땅을 더듬는 지팡이 끝에서 작게 쇳소리가 나면, 그때마다 노인의 고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엇인가 속삭이듯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노인이 읊조리는 낮은 노래가 들려왔다.


“날이 저물면, 눈 먼 사람도 별빛을 꿈꾸지.”


그 노래는 음계보다는 호흡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길을 걷던 사람들은 잠시 걸음을 늦추곤 했다. 누군가는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또 다른 이는 숨길 수 없는 연민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은 누구나 그 노래 속에 담긴 어떤 기억을, 잊고 있던 슬픔을, 자신의 오래된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노인은 바퀴 자욱이 깊게 패인 돌길을 따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가 뒤편에서 다가오면 지팡이 끝을 살짝 들어 올려 궤적을 바꾸었고,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다가오면 손끝으로 아이의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의 빈 모자에는 종종 동전 한두 닢이 떨어져 단조로운 금속음이 퍼졌다. 노인은 고개를 숙여 손끝으로 동전을 확인하곤 모자 가장자리를 살짝 접어 인사를 대신했다.


오래도록 비어 있던 카페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화가는 그 모습을 스케치북에 옮기고 있었다. 화가는 노인의 선율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지 못했지만, 노래가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온전히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연필 끝으로 노인의 굽은 등을 따라 천천히 선을 그었다. 선이 몇 번 흔들렸고, 페이지 위에서 어두운 음영이 점차 얼굴과 옷자락을 빚어냈다. 마침내 화가는 펜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다가가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잠시 말씀 나눠도 될까요?”


노인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습니다.

“젊은이, 내 눈은 세상을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는 바람보다 더 먼 곳에 닿을 수 있다네.”


화가는 놀랐다. 노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케치북을 노인의 손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노인은 종이 표면에 손끝을 대고 부드럽게 훑어 내려갔다. 종이에 새겨진 짧은 흑연의 굴곡이 마치 점자처럼 손끝을 자극하자, 노인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 선들은 내 노래가 남긴 발자국 같구나.”


화가는 얼굴이 붉어졌다. 무심코 옮긴 선이 노래라니.


노인은 동전 한 닢을 꺼내 화가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건 네 그림 값이 아니다. 내 노래를 세상에 이어 붙여 줄 다리라 생각해 다오.”


화가는 눈을 크게 떴다. 동전은 빛나는 은화도, 귀한 금화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노래를 듣는 동안 누군가 모자 속에 떨어뜨린, 가장 흔한 구리 동전이었다.


노인이 다시 길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자, 햇볕이 낮게 기울어 골목과 노인의 그림자가 하나가 되었다. 그는 노랫말을 낮게 이어 갔다.


“눈 먼 사람도 별빛을 꿈꾸지, 별이 보이지 않아도 빛은 가슴에 남으니까.”


그 순간 화가는 깨달았다. 노인의 노래가 들려준 것은 어둠 속에 갇힌 고통이 아니라, 시야를 잃고도 마음 안에 품은 끝없는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이야말로 사람들이 발길을 멈춘 이유였을것이리라.


노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골목엔 작은 선율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화가는 동전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고, 스케치북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노인의 노래를 떠올리며, 그 멜로디가 지닌 온기를 다시 한 번 기억 속에 새겼다. 언젠가 그 그림과 노래를 책 속에 담을 수 있다면, 바뇰레의 맹인이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빛도 함께 이어질 것이라 믿으면서.


그날 이후, 파리의 어느 오후를 비추던 미약한 석양빛처럼, 노인의 노래는 화가의 종이 위에서 조용히 번져 나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모퉁이에서 들려오는 낮은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의 어둠 속에 숨은 빛을 찾아내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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