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과 먼지의 기록
- 시바타 젯신, Egrets and Crows. 백로와 까마귀를 소재로한 병품 그림.
늦은 밤, 공방의 공기는 차고 짙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늙은 장인의 손이 옻칠한 흑단 함 위를 더디게 맴돌았다. 자개로 상감할 자리를 가늠하는 손길이었지만, 그는 몇 시간째 그저 함의 깊고 아득한 어둠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의 표면에 어린것은 그의 지친 얼굴과,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떠오른 먼지 쌓인 기억의 편린이었다.
그것은 어느 해 겨울이었을까.
기억은 특정 시간을 지목하지 않은 채, 그저 차갑고 시리던 감각으로만 남아 있었다. 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 젊었던 그는 영감을 찾아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흰색이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흰색이었다. 갓 쌓인 눈의 포근한 흰색,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서리의 날카로운 흰색,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반사하는 하늘의 공허한 흰색.
그때, 그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오래된 소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은 한 마리의 까마귀.
그것은 살아있는 먹물 방울이었다.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여 제 존재를 증명하는, 완고하고도 선명한 검정. 까마귀는 미동도 없이 앉아,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지켜보는 현자처럼 보였다. 젊은 장인은 숨을 죽였다. 저 압도적인 존재감, 저 고독한 검은색을 어떻게 하면 옻의 빛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한참을 그리 서 있었을까. 그의 시선이 까마귀에 단단히 붙들려 있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또 다른 형체가 나타났다. 가볍고 소리 없는 날갯짓으로 다가와, 까마귀가 앉은 가지의 반대편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은 한 마리의 백로였다.
백로의 등장은 그림의 구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단순히 검정 옆에 놓인 흰색이 아니었다. 까마귀의 검정이 '존재'의 무게를 가졌다면, 백로의 흰색은 '부재'의 깊이를 지녔다. 눈의 흰색과는 다른, 생명이 흐르는 우아하고도 서늘한 흰색.
두 마리의 새는 서로를 의식하는 듯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겨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까마귀의 침묵은 무게를 가졌고, 백로의 고요함은 여백을 만들었다. 그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과 기묘한 조화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담고 싶었던 것은 까마귀의 검정, 혹은 백로의 흰색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저 둘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 서로가 있어 비로소 완성되는 세계. 검정이 있어 흰색이 더욱 순결해지고, 흰색이 있어 검정이 한층 깊어지는 순간의 기적. 그것은 마치 잘 연마된 옻기물 위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찰나의 희열과도 같았다.
“까악.”
까마귀가 한 번 울었다.
메마른 소리는 눈 덮인 풍경 속에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부서지듯 흡수되었다. 그 소리를 신호로, 백로가 먼저 긴 목을 빼더니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뒤이어 까마귀도 육중한 몸을 허공에 띄웠다. 두 마리의 새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소나무 가지 위에는 그들이 앉았던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다시, 공방의 희미한 등불 아래.
노인은 천천히 자개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롱한 빛을 내는 조각은 백로의 날갯짓을 닮아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이 흘러 빛바랜 기억 속 풍경을 더듬어, 옻칠한 함의 가장 완벽한 자리에 자개를 내려놓았다. 그 옆에는 칠흑 같은 함의 본질, 즉 까마귀의 침묵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 까마귀와 백로가 함께 빚어냈던 찰나의 정적을, 사라져 버린 시간을 자신의 손끝으로 복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완성된 함은 그저 아름다운 물건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비와 조화, 존재와 부재에 대한 늙은 장인의 길고 낮은 헌사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