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주인
“사냥하러 가야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지운의 모습을 한 왕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검실에는 깨진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과, 두 사람의 침묵만이 남았다. 최민준 형사는 천천히, 부검대 위로 다가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뒹구는 녹슨 엽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단순한 금속의 냉기가 아니었다. 수많은 죽음의 한(恨)을 머금은 듯한,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섬뜩한 냉기.
“이게… 대체….”
장서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부정하고 싶었다. 시체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인간이 아닌 존재가 부검실을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것도 그녀가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그녀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과학과 논리의 세계가,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할머니가 잡아주던 손. 굿을 하고, 부적을 그리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던 그 손.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고 도망쳤던 피가, 지금 자신의 몸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환각과, 뼈를 통해 흘러들어온 망자의 기억이 그녀의 이성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박사님.”
최 형사가 그녀를 불렀다. 그의 남색 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고 차분했다. 혼란 속에서도, 그는 이미 다음 수를 그리고 있었다.
“오늘 본 것, 들은 것. 전부 잊으십시오.”
“네?”
“공식적인 보고서에는, ‘신원 미상의 괴한들이 침입해 증거물을 파손하고 도주했다’고만 기록될 겁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이것은 더 이상 경찰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법과 증거가 통하지 않는 세상. 그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만 했다. 지산 노인이 말했던 것처럼.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 작은 법을 어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장서린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형사님은… 믿으시는군요.”
“뭘 말입니까.”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귀신, 저주, 왕의 망령 같은 것들 말입니다.”
최 형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엽전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은 믿습니다, 박사님. 그리고 방금 내가 본 것은, 자신의 ‘근원’을 더럽힌 자에 대한 한 존재의 분노였습니다.”
그는 장서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푹 쉬십시오. 아마, 앞으로는 더 바빠질 테니까요.”
그는 부검실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이제, 화천회와 뱃사공, 그리고 한지운이라는 거대한 태풍의 눈을 쫓는, 고독한 사냥꾼이었다.
밤이 깊은 서울의 어느 고급 호텔, 펜트하우스
박종윤이 마련한, 세상의 모든 눈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은신처였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보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서화는 소파에 누워, 희미한 의식 속에서 신음했다. 그녀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지만, 영혼에 새겨진 왕의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왕은 창가에 서서,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는,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안에서, 한지운의 슬픔은 이미 복수라는 이름의 차가운 불꽃으로 변해 있었다. 왕은 그 불꽃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뱃사공….’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감히 짐의 백성을 탐해? 쥐새끼 같은..’
그의 머릿속, 왕의 기억과 기록자의 지식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뱃사공이 남긴 유일한 단서, 엽전. 그것은 단순한 노잣돈이 아니었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일종의 ‘좌표’였다. 그리고 그 좌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특정한 조건, 특정한 ‘길’이 필요했다.
“여봐라.”
그가 홀로그램 통신 장치를 켰다. 화면 너머, 박종윤의 피곤한 얼굴이 나타났다.
“찾아낼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이 도성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우물들의 위치를 모두 찾아내라. 특히, 사람이 빠져 죽은 기록이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박종윤은 의아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몇 군데 있긴 한데… 대부분은 메워졌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오래된 기록들은 데이터베이스도 엉망이고… 잠깐.”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상하군요. 특정 지역의 옛 지적도 파일 몇 개가, 암호화되어 있거나 의도적으로 손상된 흔적이 보입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감추려는 것처럼.”
“찾아내라.”
왕의 명령은 단호했다.
“단 한 곳. 아직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곳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마침내, 박종윤이 하나의 파일을 복원해냈다. 화면에, 낡은 흑백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찍힌 듯한 사진. 깊은 산속, 거대한 고목 아래에 있는 오래된 돌우물. 그리고 그 옆에는, ‘용왕당(龍王堂)’이라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그곳이 어디냐.”
“종로구, 인왕산 기슭입니다.”
박종윤이 대답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모든 공식 기록이 끊겼습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처럼.”
왕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찾았다.’
우물. 그것은 땅과 물을 잇는 통로이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 뱃사공이 자신의 강으로 드나드는 ‘뒷문’이었다.
“준비하라.”
왕이 명령했다.
“내일 아침, 인왕산으로 행차할 것이다.”
“가서, 쥐새끼의 목을 직접 비틀어 주마.”
다음 날 아침.
호텔 펜트하우스의 거실은, 전쟁을 앞둔 작전실과 같았다.
박종윤은 밤새, 인왕산 일대의 모든 데이터를 분석했다.
홀로그램 스크린 위에는, 인왕산의 3D 지형도와 함께 수십 개의 데이터 창이 떠 있었다.
오래된 지적도, 등산로 CCTV, 군 통신망, 심지어는 기상 위성의 구름 흐름까지.
그는 왕의 ‘행차’를 위해, 현대 기술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길을 그리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박종윤이 보고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지만, 기묘한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목표 지점까지, 그 어떤 필부의 눈에도 띄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최단 경로입니다. 산속의 모든 CCTV는 5분간의 루프 영상을 송출할 것이고, 주변 통신망은 일시적으로 교란될 겁니다.”
“수고했다.”
왕은 창가에 서서, 동쪽 하늘을 물들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에, 붉은 여명이 비쳤다.
“해가 뜨는군. 사냥하기 좋은 날이야.”
소파에 앉아 있던 서화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밤사이, 박종윤의 응급처치와 그녀 자신의 기력 회복으로, 거동은 가능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검게 변한 팔뚝의 문신은 불길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멸과 함께, 아주 희미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 몸으로, 짐의 발목을 잡을 셈인가.”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길을 여는 겁니다.”
서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곳은 용왕당(龍王堂). 물의 신을 모시던 곳입니다. 당신의 패기만으로는, 그곳의 주인에게 환영받지 못할 겁니다. 길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 계집의 말이 맞다.’
지운의 목소리가, 왕의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고대의 신들은, 힘만으로는 굴복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법도’가 있어….’
왕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서화의 눈을 꿰뚫어 보았다.
그 안에서, 꺾이지 않는 의지와, 자신을 향한 깊은 연민을 읽었다.
“좋다.”
그가 마침내 허락했다.
“네년의 쓸모를, 한번 증명해 보아라.”
인왕산 초입.
주말을 맞아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세 사람을 인지하지 못했다.
박종윤이 만든, 일시적인 ‘인식 장애’ 필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의 뇌가, 그들을 ‘의미 없는 배경’으로 인식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인파를 헤쳐 나갔다.
“여기서부터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박종윤은 등산로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는 소형 태블릿을 보며, 잡목이 우거진 샛길을 가리켰다.
“데이터상으로는, 이쪽이 가장 안전합니다.”
왕은 박종윤이 가리키는 샛길을 잠시 응시했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에, 태블릿의 데이터가 아닌, 산 전체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기운의 흐름이 비쳤다.
그는 샛길 입구에서 피어오르는, 아주 희미하지만 불길한 검은 기운을 보았다.
“저 길은 죽은 길이다.”
왕이 짧게 말했다.
“버러지들이 파 놓은, 어리석은 함정이지.”
“네? 하지만 모든 센서와 위성 데이터가….”
박종윤이 당황하며 반박하려 했다.
“네놈은 껍데기만 보지만, 짐은 그 속의 영혼을 본다.”
왕은 그를 무시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가파른 바위 능선을 향해 걸어갔다.
“가장 빠른 길은, 언제나 가장 험한 법.”
그는 험준한 바위를, 평지처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마른 흙이 단단해지고 흔들리던 돌들이 고정되었다.
마치 산 자체가, 왕의 행차를 위해 길을 내어주는 듯했다.
그의 몸에서는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 산의 일부, 혹은 그 주인이 된 듯했다.
서화와 박종윤은 할 수 없이, 그의 압도적인 뒷모습을 따랐다.
산을 오를수록, 공기가 달라졌다.
도시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태고의 정적이 그들을 감쌌다.
나무들은 수백 년은 족히 묵은 듯 기괴한 형태로 뒤틀려 있었고, 바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대의 문양들이 이끼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여긴….”
지운의 목소리였다. 왕의 의식 너머로, 그의 본래 인격이 속삭였다.
“이곳의 모든 것이… 기록이야. 산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 같아….”
그의 눈에,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뭄과 홍수의 고통을 보았다.
바위를 스치는 바람의 기억 속에서,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었다.
땅속을 흐르는 물의 슬픔 속에서, 목마름에 지쳐 죽어간 옛사람들의 원념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는 이 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마침내, 그들은 작은 분지에 도착했다.
박종윤이 보여주었던 흑백 사진 속, 바로 그 장소였다.
하늘을 가릴 듯 거대한 고목. 그 아래, 세월의 흔적을 이고 선 낡은 돌우물.
그리고 그 옆, 반쯤 무너져 내린 작은 사당, 용왕당.
공기는 썩은 물비린내와, 짙은 흙냄새로 가득했다.
우물 주변의 땅은, 축축한 검은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수십 개의 작은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낡은 회중시계, 색이 바랜 리본, 녹슨 열쇠, 짝 잃은 귀걸이….
모두, ‘뱃사공’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자들이 남긴, 마지막 기억의 잔해들이었다.
왕은 천천히, 우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다가서자, 우물 안에서부터 지독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우물의 돌 두겁에 손을 얹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왔다, 쥐새끼야.”
그가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더러운 강으로 통하는 뒷문이, 여기렷다.”
그의 말이 끝나자, 우물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물이 튀는 소리. 그리고.
“찾았느냐….”
그것은 뱃사공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깊고, 더 오래된.
마치 땅의 울림과도 같은, 장엄한 목소리. 이 산 전체가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쩌지.”
“이곳은 너의 왕국이 아니다.”
그 순간, 우물 주변의 검은 흙들이 일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십 개의 하얀 뼈다귀 손들이.
세 사람을 향해, 솟아 나왔다.
촤아아악-!
검은 흙을 헤치고 솟아 나온 뼈의 군대가, 세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은 단순한 해골 병사가 아니었다. 이 산에 묻힌, 이름 모를 모든 죽음의 파편들이었다.
짐승의 턱뼈에 사람의 갈비뼈가 꽂혀 기어오고, 사슴의 뿔이 달린 두개골이 허공을 날았다.
그 움직임에는 분노나 원한이 아닌, 오직 산의 차갑고 무심한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젠장!”
박종윤은 허리춤에서 작은 구체(球體)를 꺼내 던졌다.
삐-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구체에서 강력한 전자기 펄스가 터져 나왔다.
그가 가진 유일한 비살상 무기. 하지만 뼈의 군대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그것들은 기계가 아닌,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주술로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
“소용없어요!”
서화가 외쳤다. 그녀는 부러진 팔의 고통을 참으며, 품에서 부적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것들은 영혼이 없는 그릇일 뿐이에요! 산의 의지가 직접 움직이는 겁니다!”
그녀가 부적을 허공에 뿌리자, 부적들이 불꽃의 방패가 되어 날아드는 뼈 조각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수적으로 역부족이었다. 방패는 금세 부서져 내렸고, 뼈의 파도가 그들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어리석은 것들.”
왕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비취색 눈동자에, 지독한 모멸감이 서렸다.
“왕의 길을, 감히 흙먼지가 가로막는가.”
쿠우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농축된 패기(霸氣)가 폭발했다.
검푸른 기운이 해일처럼 퍼져나가, 쇄도하던 뼈의 군대를 덮쳤다. 하지만.
콰직. 콰드득.
뼈들은 부서져 나갔지만, 멈추지 않았다.
부서진 조각들이 다시 꿈틀거리며, 새로운 손과 발이 되어 기어왔다.
왕의 패기는 ‘의지’를 꺾는 힘. 하지만 이들에게는 꺾을 의지 자체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산의 명령을 따르는 손가락과 발가락일 뿐이었다.
“네놈의 권위는, 이 땅에 닿지 않는다. 스러져간 왕이여.”
산의 목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이곳의 주인은 나, 인왕산의 산군(山君)이다.”
왕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방해가 아니다. 고대의 신이, 인간이었던 자신에게 직접 ‘자격’을 묻고 있었다.
‘싸우면 안 돼….’
그 순간, 지운의 의식이 다시 왕의 분노를 비집고 나왔다.
그의 눈에는, 뼈의 군대 너머의 것이 보이고 있었다.
‘저들은… 적이 아니야. 이 산에 잠든, 슬픈 기록들이야. 길을 잃고 죽어간 나그네, 전란 속에 스러져간 병사,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아이들… 산은 그저,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려는 것뿐이야.’
지운의 공감이, 왕의 패기를 흔들었다.
왕의 분노가 한지운의 연민과 충돌하며, 힘의 초점이 흐트러졌다.
그 찰나의 흔들림을, 뼈의 군대는 놓치지 않았다.
수십 개의 뼈 손가락이, 왕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를 땅속으로, 산의 일부로 끌고 가려는 듯이.
“안 돼!”
서화가 비명을 질렀다.
“이… 하찮은 것들이…!”
왕이 분노로 포효하며, 그들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운은 왕의 의지를 억누르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
왕의 의식이 경악했다.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어본 적 없는 왕이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지운은, 무릎을 꿇었다.
산의 주인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땅을 뒤덮은 수많은 뼈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편히 잠드소서.”
지운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왕의 명령이 아닌, 기록자의 진혼(鎭魂)이었다.
“당신들의 고통과 슬픔.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 모든 시간을….”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검은 흙 위로 떨어졌다.
“내가… 기억하겠습니다.”
정적.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그를 휘감고 있던 뼈의 손들이, 스르르 힘을 잃고 흙으로 돌아갔다.
산의 분노가, 가라앉고 있었다. 산군은 힘이 아닌, 공감에 응답한 것이다.
“…….”
산의 목소리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이 기록자의 후예가 가진, 왕과는 다른 힘에 깊은 흥미를 느낀 듯했다.
“가엾은 자들의 울음을… 그칠 줄 아는가.”
산군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부드러워져 다시 울려 퍼졌다.
“좋다. 너의 자격을 보았다.”
그 순간, 우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뼈의 군대가 모두 흙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우물 안. 깊이를 알 수 없던 어둠이 걷히고, 그 아래로 소용돌이치는 푸른 물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승의 강으로 통하는, 진짜 ‘길’이 열린 것이다.
“허나, 기억하거라.”
산군의 마지막 목소리가, 세 사람의 뇌리에 쐐기처럼 박혔다.
“강의 주인은, 나보다 더 변덕스럽고 잔인하다.”
“너희의 그 가엾은 마음이, 그곳에서도 통할지는… 나 또한 알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