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건물들 (1) 서민주택
도시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비유한다면, 그 형태는 생명체가 지닌 전체 모습이고, 공간구조는 그것을 이루는 세포들과 핏줄들이 얽혀 만들어낸 생체 조직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그렇듯이, 도시도 그것을 이루는 최소 단위인 주택들이 모여서 일련의 조직체를 만들고, 그것들이 다시 모여서 전체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체적인 조직을 만들어 가는 요소는 주택이 중심이 되지만, 그 밖에도 도로, 광장 등 다양한 외부공간과 일반 건축물들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면서 존재하게 되고, 이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도시의 고유한 공간조직을 형성한다. - 손세관 <피렌체 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열화당, 16쪽)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다. 그 때문인지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건물의 신축이나 증축에 엄격한 제한을 두어 옛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래된 도시가 그렇듯이 피렌체 역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다. 그리고 도로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옛 모습 그대로 돌을 촘촘히 박아 넣은 형태이다. 나는 자동차가 이 도로 위를 지날 때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참 좋아한다. 물론 길을 가득 메운 관광객으로 인해 쉴 새 없이 울리는 경적은 제외하고 말이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골목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사람들이 붐비는 유명한 관광지 근처의 광장이나 큰 도로와 달리 조용한 골목길은 피렌체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그렇게 걷다 보면 문득 골목길 어귀에서 괜찮은 식당이나 카페를 만날 수도 있다. 블로그에 소개되어 북적이는 유명 맛집도 좋겠지만, 이런 곳에서 여유 있게 즐기는 식사는 온종일 걸어 다녀야 하는 피렌체 여행에서 괜찮은 쉼표가 되어 줄 것이다.
이런 골목길 양옆은 모두 좁고 높은 주택들이 빽빽하게 이어져 있다. 보통 수백 년은 된 듯한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도 좋지만 이렇게 작은 주택들도 조금만 알고 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서민들의 주택, 스키에라형 주택
피렌체 지도를 보면 모든 길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 길을 나타내는 말로 '비아(via)'와 '보르고(borgo)'가 있다. 이 단어를 붙여 '비아 세르비(Via dei Servi, 세르비 거리)'처럼 거리 이름을 표현한다. 그런데 비아와 보르고는 그 유래가 조금 다르다. 비아는 옛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웠던 성벽 안에 있었던 길을 지칭한다. 반면 보르고는 성벽 밖에 있는 외곽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과거 보르고 지역에는 빈민들과 장애인, 매춘부 등 사회 주류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런 비아와 보르고를 따라 촘촘히 들어선 일반 서민 주택은 주로 스키에라형 주택이라고 부른다. 스키에라형 주택들은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중반에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이 당시 각 수도원들은 도시 곳곳에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부동산을 주택지로 조성하여 공급했기 때문이다. 스키에라형 주택은 19세기까지 피렌체의 대표적인 주거형태가 되었다.
수도원들이 개발한 신규 주거 지역의 일부는 도심 외곽에 형성되었다. 부유층들이 거대한 저택(팔라초)을 짓고자 도심의 하층민 거주 지역을 매입하면서 밀려난 사람들이 여기로 모여들기도 했다.
스키에라형 주택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웃집과 벽을 공유하는 것이다. 스키에라(schiera)는 '대형을 이룬 편대'라는 뜻인데 수많은 집들이 벽을 붙이고 길게 늘어선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벽을 공유하면서 촘촘하게 붙어 있기 때문에 연립주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키에라형 주택은 단독주택이다.
스키에라형 주택은 보통 3층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심에서 만나는 상당수의 스키에라형 주택은 1층이 상점이고 2층부터는 주거 구역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건물의 1층은 상품을 진열하는 가판대를 설치하기 위해 커다란 개구부가 뚫려 있다. 이 개구부 옆에는 주거구역인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 입구가 있다. 이런 형식을 '보테가(bottega, 상점이라는 뜻)' 형식이라고 한다.
보테가 형식과 달리 1층부터 위층까지 모두 주거구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1층에 개구부가 없고 현관문만 있다. 이런 형식을 '아트리오(atrio, 현관/로비라는 뜻)' 형식이라고 한다.
보테가 형식은 상점이기 때문에 주로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에 위치한다. 일종의 주상복합 주택이다. 반면 아트리오 형식은 유동인구가 적고 한적한 동네에서 많이 보인다.
이런 스키에라형 주택은 기본적으로 한 가구가 살았다. 단면적이 좁기 때문에 2층은 거실이나 식당, 부엌이 있었고 3층에 침실을 두는 형태였다. 현재 스키에라형 주택을 개조한 숙박시설에 투숙할 경우 생각보다 방이 좁고 원룸 형태(스튜디오)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금 여유가 있는 상인들은 작은 중정이 있거나 보테가와 아트리오 형식이 혼합된 좀 더 큰 스키에라형 주택에 살았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서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형태의 스키에라형 주택이 등장했다. 제일 위층에는 부모 세대가 살고 아래층에는 자녀 내외가 사는 형태였다. 이것이 계속 발전하여 스키에라형 주택은 조금씩 규모가 커지고 다세대 주택의 형태로 변화했다.
다세대 주택이 되면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계단의 형태 변화이다. 독립주택의 계단은 일자형이다. 다시 말해 계단을 통해 다른 층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이는 건물에 사는 사람이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였다. 하지만 다세대주택으로 발전하면서 계단은 'ㄷ'자 형으로 변한다. 'ㄷ'자 형 계단에서는 한 층에서 다른 층을 직접 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각 세대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될 수 있었다.
이렇게 조금 더 커진 다세대 스키에라형 주택은 13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고,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대표적인 주택 형태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현재 피렌체에서 보는 스키에라형 주택의 내부는 대부분 'ㄷ'자 계단을 가지고 있다.
더 커진 독립성, 리네아형 주택
다세대 주택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스키에라형 주택은 기본적으로 매우 좁아 공간 활용에 제한이 컸다.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스키에라형 주택의 협소한 공간은 이를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러 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환기나 채광 등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좀 더 크고 각 공간의 독립성을 확대한 '리네아형 주택(case in linea)'이 등장한다. 리네아형 주택은 횡으로 길게 연결된 주택 형태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스키에라형 주택 두 채를 합한 10미터 정도의 폭이었으나 이후 20미터 이상으로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상류층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중산층들이 대규모 리네아형 주택을 짓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현대의 아파트와 비슷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상류층처럼 팔라초(Palazzo, 저택)를 짓고 싶으나 여력이 부족했다. 대신에 팔라초의 외부 장식을 흉내 내서 자신들의 주택을 장식하기도 했다.
리네아형 주택은 건물 가운데 'ㅁ'자형태의 계단을 두었다. 'ㄷ'자 형태의 계단보다 각 층과 방의 독립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가 있고 그 옆으로 문들이 위치한다. 이 문들은 현대 아파트로 치면 각 호실이며 한 가구가 사는 주거 공간이었다. 이런 'ㅁ'자 형태의 계단이 있는 건물은 계단 가운데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가 스키에라형 주택보다 용이하다. 스키에라형 주택은 워낙 공간이 협소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재 피렌체에서 우리가 이용하는 호텔 중에는 이런 리네아형 주택을 개조한 경우가 많다.
결국에는 삶의 공간인 도시
지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떠날 수 있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언제가 되었든 우리가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주로 유명하고 화려한 건축물 위주로 동선을 짠다. 그런데 위대한 건축물들은 크고 작은 도로와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고, 그 길은 일반 서민들의 주택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축적되어 있다. 이런 주택들이 모여서 피렌체라는 도시의 구조와 이미지를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바쁜 일정으로 인해 이런 삶의 공간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웅장한 건축물 외에 서민들의 주택에도 약간의 관심을 기울인다면 피렌체는 더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다시 떠나게 될 우리의 여행 또한 좀 더 풍성해질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손세관 <피렌체 시민정신이 세운 르네상스의 성채> (열화당)
성제환 <당신이 보지 못한 피렌체> (문학동네)
팀 팍스 <메디치 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