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방송에 대한 역사
우리나라의 방송은 1927년9월21일 경성방송국(호출 부호 JODK)으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1935년 기존의 JODK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고 조선방송협회를 결성, 1936년부터 부산방송국(JBAK)을 시작으로 지역방송국 체제를 갖추었다. 해방 후에는 1947년 서울중앙방송으로 재 출범하였다. 1961년 TV 방송을 시작했으며 1973년 한국방송공사(KBS: Korean Broadcasting System)로 공영방송 체제를 갖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방송법에서는 방송프로그램을 기획, 편성, 제작하여 전기통신설비로 시청자에게 송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세분하여 텔레비전방송, 라디오방송, 데이터방송, 이동멀티미디어방송이 포함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미국은 방송을 공중이 수신할 수 있는 무선 통신으로 정의한다. 영국은 방송을 일반인 대상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전신, 전화를 포함한 시각적, 음성 정보 무선 송출로 정의하며, 일본도 공중이 직접 수신을 목적으로 하는 통신으로 방송을 규정하고 있다. 방송의 정의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방송의 범위가 넓어짐을 반영하며, 각국이 디지털 시대에 맞춰 방송의 법적 프레임워크를 현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있다.
1927년에 설립된 경성방송국(JODK)은 한국 라디오 방송의 시초였다. 이는 1935년에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명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후 조선방송협회를 결성하고, 1936년에는 부산방송국(JBAK)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지역 방송국을 설립했다.
이들 지역방송국에는 평양(JBBK), 청진(JBCK), 이리(JBFK), 함흥(JBDK), 대구(JBGK), 광주(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마산(JBOK), 목포(JBNK), 성진(JBPK), 청주(JBQK), 강릉(JBRK) 등이 포함되었다. 이후 1935년 부산방송국, 1936년 평양방송국이 개국했다. 1954년 CBS, 1961년 MBC, 1963년 DBS가 민간방송으로 개국했으며, 1964년 라디오서울이 개국한 뒤 1966년 동양방송(TBC)으로 개칭했다. 이러한 확장은 조선 총독부의 지휘 하에 일제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47년, 서울중앙방송으로 재출범하며 국영 방송의 기틀을 다졌고, 1961년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대중매체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1973년에는 한국방송공사(KBS)로 명칭을 변경하며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이후 한국 방송은 디지털화, 인터넷 방송을 통해 뉴미디어 시대로의 전환을 거쳐 왔으며, 이는 미디어의 다양화와 글로벌화를 이끌고 있다.
1915년 서울에서 최초의 무선전화 송수신 시험을 경성 우편국과 체신국 사이에서 실시됐다. 1925년에는 체신국에서 50W 출력으로 최초 무선방송을 실험했다. 1927년 9월 21일, 경성방송국(JODK)이 세계 6번째로 송신출력 1kW, 송출주파수 690kHz로 정규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초기 라디오 수신기는 수화기식과 확성기가 달린 전지식이었다.
한국의 TV 방송 역사는 1956년 5월 12일, HLKZ-TV(KORCAD-TV)의 개국으로 시작됐다. 이는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텔레비전을 도입한 사례이며, 서울에서는 주요 공공장소에 TV 수상기를 설치하여 방송을 송출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시청할 수 있게 했다. HLKZ-TV의 설립은 미국 RCA의 한국 대리점 주인 황태영이 공보실의 방송확대 계획에 따라 미국 RCA와 협약을 맺은 결과였다. 초기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고가의 TV 수상기 가격으로 인해 상업방송으로의 전환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대형 옥외 수상기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난관을 겪으며 1961년 국영 KBS에 채널이 넘어가고, KORCAD-TV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0~1970년대는 한국 TV 방송의 확장기로, 국영 KBS의 개국을 시작으로 TBC, MBC 등 여러 민영 방송국이 개국하며 시청률 경쟁이 본격화됐다. 이 시기 방송망은 전국적으로 확장되어 갔으며, TV 수상기의 보급을 통해 대중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1972년 방영된 KBS 드라마 '여로'는 대한민국을 휩쓴 드라마였었다. <여로> 방송 시간에는 거리의 행인과 차량이 멈추고 사람들이 TV가 있는 집이나 전파사 앞에 모여들었다. 영화관마저 영화 상영을 중단하고 극장에서 TV로 '여로'를 방영할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마저 국무회의 전에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로 사회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시청률 집계 시스템은 없었지만, 시청률이 70%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하나 '여로'의 방영으로 우리나라에 유선방송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골 집에 사시는 부모님들께 여로를 보여 드리기 위해 자식들이 난청지역에서 동축케이블로 방송을 중계해 드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국의 산간지역 등 방송 난청지역에 TV 드라마를 보기 위한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또한 KBS에서는 경제성 문제로 방송 송신소를 세울 수 없는 것에 텔레비전간이중계기(TVRO: TV repeater office)라고 하는 장비를 설치하여 난시청지역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컬러 TV의 전면 도입과 함께 다채널, 뉴미디어 시대가 열렸다. 언론 통폐합을 통해 KBS 중심의 공영방송체제가 재정비되었으며, 프로그램의 다양화와 함께 TV는 국민 생활의 중심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1981년 TV 수상기 보급률이 80%를 넘어서며 TV는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 됐다. 이후 교육방송, SBS, 케이블 TV 등이 새롭게 등장하며 방송 시장은 더욱 다양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민영방송의 등장과 함께 방송구조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공민영 혼합제도의 도입, 신규 민영 방송의 허용 등으로 방송 시장이 크게 변모했다. KBS, MBC 등 기존 방송사는 지방 방송과의 제휴를 통해 서비스를 확장했고, SBS의 개국은 방송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한국 TV 방송의 역사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점차 발전해 나가며 국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다채널 시대와 뉴미디어의 도래는 방송 콘텐츠의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광석 라디오, 또는 게르마늄 라디오는 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신기이다. 방연석이나 실리콘 같은 광석과 저전압에서도 작동하는 '크리스탈 이어폰'을 사용한다. 안테나로부터 약한 전파를 검파해 소리를 내지만, 소리가 작고 잡음이 많으며 수신 범위가 좁다. 주로 한 개의 채널만 수신 가능하며, 더 큰 소리를 위해서는 별도의 증폭기를 필요로 한다. 구조가 단순해 작고 휴대가 간편하여 초기 기술개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나라 등 극한 상황에서 사용됐다. 전쟁 중 참호 등에서 금속류를 이용해 만들어 정보를 얻는데 쓰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는 1959년, 광복 이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국산 라디오 'A501'이 판매됐다. 이 제품은 화장품 사업으로 성공한 회사가 개발했으며, 설계자는 전자제품과 과학기술에 관심 많던 중학교 교사 출신 김해수 선생이었다. 'A501' 라디오는 한국 제조 전자제품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 당시 라디오 수신기는 미국의 제니쓰, GE, 모토로라 등에서 생산한 제품들로 엄청난 가격을 치루어야 하였다.
금성사의 VD-191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제품이다. "VD"는 진공관식 "배큠 데스크 타이프"에서 유래했고, 191은 19인치 첫 모델을 의미한다. 12개의 진공관으로 구성된 이 제품은 수동 채널 조정과 볼륨 조절 기능을 앞쪽에 배치했으며, ‘학다리’ 받침다리가 특징이다. 발매 가격은 당시 월 평균 소득의 5배가 넘는 6만원대로, 추첨제로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당시의 TV수상기는 거의 콘솔이라고 하는 장롱형식의 모델이 주를 이루었다. 박스 앞에는 미닫이 문을 달고 자물쇠를 채울 수 있게 하여 시청을 하기 위해서는 5~10원 정도를 넣게 만들기도 하였다.
국내 방송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라디오 방송은 여전히 정보의 접근성, 교육, 오락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대에는 팟캐스트와 인터넷 라디오 스테이션 등 형식의 방송이 출현함으로써 청취자들에게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라디오 방송은 이처럼 오랜 역사를 통해 국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으며, 계속해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은 방송통신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운영하여야 한다. 1990년 이전까지 방송국의 허가와 운영에 관한 규제와 통제는 문화부와 정보통신부가 나누어 관장을 하고 있었다. 이후 방송통신위원회가 설립되고 부터 한 곳으로 통합되었다 법 규제와 통제에 관한 사항은 정부 조직법 등으로 변화가 자주 일어 나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다만 필자가 담당했던 일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보기로 하겠다. 1987년경으로 기억되는 일이다. 당시 체신부 전파관리국에서 SBS 방송국 허가를 위해 주파수를 할당하여야 했다. 결재를 받는 과정에 전파의 특성에 따른 도달거리로 인하여 주파수의 혼신을 방지하여야 한다는 표현 때문에 있었던 일이다.
방송국 허가에 관한 보고서에 '전파전파'라는 문구가 있었고 이를 본 장관이 전파가 두번 들어 갔다는 지적을 하였다. 그래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하는 지시가 내려 왔다. '전파전파'는 전파의 전달을 의미하며 업무적으로 쓰는 표현이었다. 영어로는 "radio wave propagation'이라 하고 한문으로는 '電波傳播'라고 쓰는 관용어였다. 이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기 보다는 지금까지 계속 사용해 오던 용어라는 것을 설명하기로 하였다.
다시 가지고 들어 간 보고 자리에서 예를 들어 가면서 몇번의 설명을 하게 되었고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요지는 장관이 지시를 하였음에도 수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기술적인 맥락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대로 통과되는 듯했지만 마지막 멘트가 압권이었다. 이사람들아 그러면 전파 스퀘어(전파²)라고 하면 되지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서에는 전파스퀘어라고 쓰고 발송하는 문서에는 그대로 표시해서 내 보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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