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승리 이끈 전략가, ‘책임 총리’로 남은 정치 유산
이해찬 전 총리, 베트남 순방 중 타계…민주 진영의 큰 별 지다
2026년 1월 25일,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베트남 순방 중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 정치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한 시대의 민주주의를 보낸다”, “민주주의 역사의 큰 스승을 잃었다”는 메시지로 애도를 표했다. 누군가에게 그는 반독재 투사였고, 누군가에게는 네 명의 민주정부 대통령을 배출한 ‘킹메이커’였으며, 또 다른 이들에겐 거대 양당 구조를 공고히 만든 ‘권력의 설계자’였다.
이해찬의 이력은 곧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을 따라간다. 1970년대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섰고, 1980년대에는 서울 신림동의 ‘광장서적’을 운영하며 재야 민주화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1988년 김대중 계열 정당을 통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한 이후, 그는 7선 국회의원,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여야를 넘나드는 당 대표를 역임하며 정치권의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
교육부 장관 시절, 그는 고교 평준화 확대와 야간 자율학습 폐지 등 당시로서는 과감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등장한 표현이 이른바 ‘이해찬 세대’다. 학교 서열화 완화와 입시 경쟁 구조를 일부 누그러뜨리려 했던 시도는 찬반 논쟁을 불렀지만, 이후 교육정책 논의에서 ‘과도한 경쟁 완화’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총리로 불리며,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우며 국정을 논의했다는 일화는, 행정부 중심부에서 정책 기획과 조정의 축을 쥐고 있던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60대 이후의 이해찬은 선거와 정당 구조의 ‘건축가’에 가까웠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맡으면서, 그는 이른바 ‘시스템 공천’을 정착시키고자 했다. 계파장, 지역구 챔피언, 정치 신인의 충돌을 공천 룰 속에 흡수하려 한 시도였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위성정당을 포함해 300석 중 180석을 확보한 기록은, 민주화 이후 단일 정당 기준 최다 의석이다. 비례 위성정당이라는 설계는 거센 비판도 받았지만, 선거 전략과 제도 활용을 통해 승리를 만들어내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역 균형발전은 그의 이름과 떼기 어렵다. 세종시 건설과 행정수도 이전 논의는 단순한 행정조직 개편이 아니라, 수도권 일극 체제를 완화하려는 ‘구조 변화’ 실험이었다. 실제로 세종시는 2012년 출범 이후 공공기관과 중앙부처 이전을 통해 인구 약 40만 명 규모 도시로 성장했고, 충청권 전체의 정치·행정 지형을 바꾸었다. 물론 여전히 수도권 집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비판과 함께, 세종·혁신도시 정책이 공공기관 이전 이상의 산업·교육·주거 전략과 결합되지 못했다는 한계도 공존한다. 이해찬이 던진 질문은 유효했지만, 해답은 아직 미완이다.
정치권에서 그가 가장 자주 불린 호칭은 ‘킹메이커’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등 민주당 계열 네 명의 대통령이 모두 그의 기획과 조정을 거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정계로 설득해 끌어들인 것도, 이재명 대통령의 도덕성 논란과 당내 위기 국면을 물밑에서 수습한 것도 이해찬이었다는 증언이 여러 차례 보도됐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청와대를 향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권력의 중심에 있으되, 언제나 한 발 비켜선 ‘설계자’로 남는 것을 택한 셈이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가 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친 발언과 강성 이미지는 상대 진영뿐 아니라 중도층에도 거부감을 줬고, 당내 의사결정이 소수 핵심에 집중된 “밀실 정치”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180석 여당 체제 이후 견제장치가 무력화되고, 검찰개혁·입법 드라이브 과정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지적 역시, 이해찬식 ‘강한 당’ 모델의 부작용으로 거론된다. 그의 유산을 평가하는 일은 곧, 강한 기획과 강한 정당이 민주주의의 깊이를 함께 키웠는지, 아니면 승리의 관성에 민주정의 섬세함을 일부 희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번 별세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현 집권 세력 내부에서 맡고 있던 ‘보이지 않는 역할’ 때문이다. 이해찬은 이재명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이자, 이른바 친명계의 상징적 보호막 역할을 해왔다. 이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 역사의 큰 스승”, “정교한 정책으로 승화된 민주주의의 기개”라며 깊은 비통함을 표했다. 그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 지금, 민주당 내부에서는 친명·비명 갈등을 조정해오던 ‘완충지대’가 사라졌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앞으로 당의 노선·공천·지도부 구성 과정에서 갈등이 보다 직접적인 충돌로 표출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공백을 특정 계파의 재편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해찬이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정당 민주주의’의 후퇴가 될 수 있다. 정치권이 그의 부재를 진정으로 애도하려면, 몇 가지 과제를 제도적 대책으로 삼아야 한다. 첫째, 시스템 공천을 포함한 정당의 공천 룰을 다시 한 번 투명하게 정비하고, 당내 민주적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둘째, 세종시·혁신도시·특별지방자치단체 등으로 이어져온 지역 균형발전 전략을 정권과 계파를 넘어 지속 관리하는 독립적 거버넌스를 설계해야 한다. 셋째, ‘강한 당’이 곧 ‘강한 리더 한 사람’으로 수렴되지 않도록, 중재와 숙의 기능을 제도화하는 정당 문화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오늘날 정치의 대부분은 SNS 메시지, 이미지 정치, 감정적 프레이밍에 쏠려 있다. 클릭 수와 조회 수가 정치적 영향력을 대신하면서, 구조를 설계하고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 중이다. 이해찬은 말보다 실행과 설계를 앞세운 드문 유형의 정치인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추모를 넘어서야 할 시점이다. 그가 남긴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직시하며, 정당과 정치 전체가 다시 한 번 ‘정치는 구조를 짓는 일’이라는 평범하지만 잊힌 진실을 복원할 때, 비로소 그의 부재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