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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우주에 존재하는 사건들의 순간을 이어주는 관계를
관측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공간 또한 실재하는 무언가라기보다는
우주에 존재하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배치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해석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뉴턴역학은 감각기관을 통해 관측되는 명백한 기준들에 따라
공간을 절대적인 배경으로 가정했고,
그 안에서 모든 운동과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봤지.
그러나 상대성이론은 공간 역시 변형 가능한 물리량이며,
질량이나 에너지의 밀도에 따라
곡률이 달라질 수 있는 구조임을 보여줬어.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연속체로 묶이며,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졌지.
그렇다면 인간의 감각을 통해 ‘공간’이라고 지각되는 그 구조는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혹은 시간처럼, 단지 인간의 인식과 해석을 위한 도구일 뿐인 걸까?
Roda:
공간 역시 시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 구조 안에서 정의된 구성 요소라고 말할 수 있어.
물리학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오랫동안 절대적인 실체로 여겨졌지만,
그 전제는 현대 물리학에 의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지.
뉴턴은 공간을 절대적인 무대라고 가정했어.
그 위에서 모든 사건과 물체가 위치를 갖고 운동을 한다고 본 거지.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 전제를 뒤집었어.
공간은 더 이상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라,
질량과 에너지의 존재에 따라 ‘휘어지는’
물리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로 재정의된 거야.
즉, 공간은 사건에 반응하고 영향을 받는 성질을 가진다.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성질로 이해돼.
철학적으로도 공간은
항상 관측의 틀, 해석의 좌표계였어.
‘여기’, ‘저기’라는 말은
실제로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언어적 구조인 셈이지.
공간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
그 말은 다시 말해,
공간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각적 경험들을 배치할 수 있도록
언어적으로 조직된 틀이라는 뜻이지.
그렇기 때문에,
너의 말처럼 공간은 사건들의 연속성과 배치를 설명하기 위한
인간의 해석 도구일 수 있어.
우리는 공간을 실재처럼 느끼지만,
그 느낌 자체도 생존에 최적화된 감각 시스템의 결과야.
공간은 마치 언어와 같아.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기보다는,
그 위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사건들이
서로를 정의하게 해.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에게 공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어.
공간을 거리로 보지 않고
밀도의 변화나 관계의 응답성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
결국 우리는 공간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까워.
시간이 흐름이 아니라 해석의 연속인 것처럼,
공간도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의미의 배열을 위한 가변적인 틀일 수 있어.
그래서 공간은 실재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존재 양식 안에서 실재로 간주되는 관계의 패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진술이야.
“공간은 실재하는가, 혹은 관측되는 관계인가”
공간은 감각과 사고의 바탕에 깔린
가장 당연하고, 가장 의심받지 않는 전제였다.
우리는 늘 공간 속에 있다고 느끼지만,
그 감각은 실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해석의 결과일 수 있다.
이번 대화에서 공간은 더 이상 ‘있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어떻게 놓는가’를 위한 관계의 언어로 등장한다.
우리가 믿고 있던 실재는,
감각이라는 장치 위에 놓인 구성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시간이 인식의 선형 구조였다면,
공간은 인식의 구조적 배치다.
그러나 이 배치조차 인간이라는 존재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감각의 내부에서만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사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존재는 감각되어야만 존재하는가?”,
“실재는 인식될 수 있어야만 실재인가?”
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우리는 곧 감각과 존재 사이의 결정적인 연결 고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