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우울

by Roda with RED

감정집 2장 「슬픔」—세부 감정: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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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문학 수필 — 가라앉은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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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다. 밤새 잠은 잤는데, 일어난 느낌은 없었다. 눈꺼풀은 열렸지만, 몸은 여전히 눌린 상태였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동작 하나가 거대한 결심처럼 느껴졌다. 우울은 이렇게 시작된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하루의 첫 장면이 무거워진다.


거울 앞에 서서 세수를 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 손바닥을 적시는 그 온도가 오늘의 내 마음 같았다. 차라리 뜨겁거나 차가우면 선명할 텐데, 중간에 머무는 탓에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다. 우울은 중간의 감각 속에 오래 눌러 앉는다.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보지만, 목록은 곧 구름처럼 흩어진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평소라면 불안을 없애기 위해 일정을 정리하고 메모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울 속에서는 그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불안을 줄이는 대신 불안이 더 짙어진다.


점심시간, 음식을 씹으면서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배는 고픈데 입안은 비어 있는 듯하다. 맛을 느끼는 감각과 먹는 행위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우울은 감각과 의미를 서로 연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웃음도, 눈물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감정이 끊어진 채 둥둥 떠 있다.


저녁 무렵, 창밖에 노을이 물들었다. 색은 분명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색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빛은 있었으나 따뜻하지 않았다. 우울은 그렇게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밤, 불을 끄고 누웠다. 오늘 하루를 다시 떠올려도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는 무겁게 지나갔다. 나는 천장에 찍힌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우울은 슬픔처럼 울 수도 없고, 기쁨처럼 웃을 수도 없는 감정. 방향을 잃은 감정의 그림자가 천장 위에 번지는 것.



(2) 현실 소설 — 흐려진 윤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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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불빛은 언제나 같은 색이었다. 흰빛이지만 누렇게 번지는 형광등. 책상 위 문서들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컴퓨터 화면은 아침부터 그대로 켜져 있었다.


민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서는 달라진 게 없는데, 자신이 뭔가 한 듯 착각하게 만든다. 메일 알림이 올라와 있었지만, 열어보지 않고 창을 닫았다. 열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다음으로 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들과 식당에 갔다. 메뉴판에 적힌 글자들은 뚜렷했지만, 어떤 걸 고르든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민수는 늘 하던 말을 했다. 국은 뜨거웠지만, 뜨거움이 목을 덥히는 순간에도 마음은 여전히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중간에 머물렀다.


동료들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웃음소리가 테이블을 채웠다. 민수는 입꼬리를 조금 올렸지만, 그 웃음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건네준 빛을 따라 하는 그림자 같았다. 웃음은 흘러갔고, 그는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오후 회의에서 팀장은 새로운 계획안을 설명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적었다. 메모 속 글자는 분명 존재했지만, 그 의미가 머릿속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록은 있는데, 그 기록이 자신과 연결되지 않았다.


퇴근 후 지하철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오늘 하루 종일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흐린 사진처럼 잘 잡히지 않았다.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만, 선명한 윤곽이 사라진 얼굴처럼.


집에 도착해 불을 켰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하루를 살았다는 감각은 옅었다. 민수는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쳤다. 빈칸을 채우려다 펜을 멈췄다. 결국 적은 건 단 한 줄이었다.


“오늘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3) 서간문 — 문턱 앞에서 부탁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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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요즘 나는 일을 하고 말도 하지만, 하루가 끝나면 잘 살아낸 감각이 옅어.

특별히 큰 일은 없는데 마음이 자꾸 중간에 머물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문턱 앞에서 오래 서 있는 기분이야. 이유를 끝까지 따라가 보려 해도, 금세 흐려지고 돌기만 해. 그래서 웃음도, 눈물도 쉽게 나오지 않아.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야. 내 상태를 알려두고 싶었고, 너에게 작은 부탁을 하고 싶었어. 해결책을 바라는 건 아니야. 그냥 숨을 맞추는 시간이 조금 필요해.


첫째, 이번 주 안에 저녁에 잠깐만 같이 걸을 수 있을까. 오래가 아니어도 돼.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돌면서, 말이 없어도 옆에 있어주면 고마울 것 같아.

둘째, 내가 읽고도 바로 답하지 못할 때가 있어. 그때는 ‘지금은 말이 정리가 안 되는구나’라고 이해해 줘. 내가 준비되면 먼저 연락할게. 정말 급하면 “지금 필요해”처럼 알려줘.


혹시 네가 바쁜 날이면 미뤄도 괜찮아. 무리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너도 힘든 게 있으면 알려줘. 그땐 내가 옆에 설게.


오늘 편지를 여기까지 쓸게.

고맙고, 곧 보자.


드림



(4) 일기 — 작게 움직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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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알람을 끄고 눈을 떴다. 잠은 잔 것 같은데 깨어난 느낌이 분명하지 않았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두었다. 바람이 커튼을 아주 얇게 밀었다가 돌아갔다. 그 움직임을 한참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었다. 물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오늘의 마음도 그 온도였다.


책상에 앉아 할 일을 적어 보려다가, 종이 위에 펜이 오래 머물렀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불안이 줄어드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생각은 금방 흩어졌다. 불안을 줄이는 대신 불안의 테두리만 굵어졌다. 메신저에 찍힌 알림을 열었다가 닫았다. ‘지금은 정리가 안 되는구나’라는 문장을 속으로 한 번 말하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화분 잎을 손끝으로 쓸었다. 잎맥이 살아 있는 느낌이 났다. 물을 조금 따라 주고, 컵을 엎어 말렸다. 그 사이에도 마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손을 한 번 움직였다는 사실이 남았다. 우울은 거창한 변화보다 ‘움직였다는 사실’ 같은 작은 증거를 필요로 한다는 걸 기억해 본다.


점심은 가까운 곳에서 간단히 먹었다. 맛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뜨거운 김이 얼굴을 스쳤다. 뜨겁지 않은 마음에 김의 온기가 잠깐 닿았다가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낮게 흘렀다. 예쁘다고 느끼기까지는 힘이 부족했지만, ‘구름이 있다’는 사실은 적을 수 있었다.


오후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종이 모서리가 들썩였다. 들썩임이 거슬려서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흔들리는 것을 당장 멈추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보았다. 커서는 계속 깜빡였고, 나는 한 문장만 썼다. 길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문장 하나는 문장 하나다.


저녁 무렵, 휴대폰을 잡고 잠깐 산책을 나갔다. 골목 끝 편의점 네온사인이 먼저 켜졌다. 따뜻한 우유를 하나 샀다. 계산대 앞 플라스틱 매트가 발밑에서 미세하게 끈적였다. 이런 사소한 감각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울할 때는 이런 것들이 하루를 붙잡아 준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켰다. 방 안 사물들이 제자리에 있었다. 오늘을 정리하려고 노트를 펼쳤다. 길게 쓰지 않기로 했다. 한 줄만 적었다.


“오늘은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창문을 열었고, 물을 주었고, 걸었다.”


그 아래에 메모를 하나 더 붙였다.

– 불안을 지금 당장 없애려 하지 말 것. 대신 ‘있다’고 이름 붙일 것.

– 감정을 해석하려 애쓰지 말 것. 먼저 감각을 적을 것.

– 말이 막히면 움직임을 하나 남길 것. 창문, 물, 걸음.


불을 끄기 전에 물 한 컵을 더 마셨다. 컵 입구가 이마에 잠깐 닿았다. 오늘의 끝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내일도 중간 온도의 하루일 수 있다. 그래도 점 하나를 찍을 수 있다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5) 여행기 — 도착 없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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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지하철 노선도를 멍하니 보다가 손에 잡히는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이유는 없었다. 마음속 지도가 지워진 날에는, 어디든 가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환승역 대합실에 앉아 있는 동안, 안내 방송이 몇 번이나 흘렀는지 세어 보려 했지만 금방 놓쳤다. 숫자는 쉽게 흩어졌다.


강 건너 공단이 보이는 역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회색 건물 사이로 천천히 걷다 보니 강변 산책로가 나왔다. 물은 흐르고 있었지만 속도가 잘 읽히지 않았다. 표면만 매끈하게 반짝였다. 난간을 잡아 보았다. 금속이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차갑다는 감각만은 확실했다. 그 확실함이 오늘 처음이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생수를 샀다. 강가 벤치에 앉아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밥은 밥 맛이 났다. 김의 짠맛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맛이 입 안에서 금방 사라졌다. 씹고 삼키는 동안, 마음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낮은 구름이 길게 눌려 있었다. 구름의 모양을 붙잡아 보려다, 그냥 눈을 내렸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자전거들이 옆을 지나갔다. 벨 소리가 생기처럼 가깝게 왔다가 멀어졌다. 소리는 남지 않았다. 강 위 다리 밑을 지날 때, 콘크리트 기둥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거칠고 건조했다. 손끝에 남은 가루를 털어내면서, 오늘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더듬어 보았다. 여전히 찾기 어려웠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게가 있었다. 이유를 세우려 하면, 생각이 공중에서 멈췄다.


부두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낚싯대를 든 사람들이 있었다. 물수제비를 뜨던 아이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가 금방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를 지나갔다. 나를 포함하지 않는 풍경 속에 오래 서 있었더니, 내가 가벼워진 것도 무거워진 것도 아니고, 그냥 덜 선명해졌다. 선이 옅어지는 느낌. 사진의 테두리를 문질러 지운 것처럼.


창고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를 한동안 봤다. 색이 빠지고 구겨진 모서리. ‘안전 제일’이라는 문장이 바래 있었다. ‘제일’이라는 단어가 웃음도 울음도 아닌 곳에 걸렸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는 감정이 목 안쪽에서 잠깐 멈췄다가, 곧 풀렸다. 바람이 포스터 끝을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놓았다. 나도 그 동작을 따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시장 쪽에서 국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왔다. 배가 고픈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국수집에 들어가 앉았다. 따뜻한 국물이 앞에 놓였고, 김이 위로 올랐다.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려 입에 넣었다. 혀끝으로 뜨거움이 먼저 닿았고, 그다음에 간장이 느리게 따라왔다. 맛은 있었다. 그런데 맛이 나를 통과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나갔다. 그걸 보고만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다시 강쪽으로 걸었다. 이번엔 반대편 둔치로 내려가 봤다. 발밑 흙이 조금 질었다. 신발 바닥에 묻은 흙이 무겁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 무게가 마음의 무게와 같은지 다른지 잠깐 비교해 보려 했지만, 금방 관둬 버렸다. 비교할 힘이 없었다. 강가에 서서 물속으로 던져진 플라스틱 병을 보았다. 표면에 햇빛이 얇게 붙어 있었다. 예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눈은 계속 그 빛을 따라갔다. 따라간다고 해서 가까워지는 건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커다란 바람막이 유리 뒤에 내가 비쳤다. 얼굴이 창문 속 풍경과 겹쳤다. 내 윤곽이 강의 윤곽과 섞였다. 잠깐 손을 들어 얼굴 앞에 대 보았다. 손가락과 뺨의 간격이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 어긋남을 바로잡을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떠올리지 않아도 버스는 왔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계속 봤다. 신호등, 공사장 가림막, 세차장 깃발, 같은 것들이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것들은 안심을 주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흐렸다. 알림이 두 개 떠 있었지만 열지 않았다. 급하지 않은 표정의 알림들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버스표를 접었다 폈다. 접힌 자리의 하얀 선만 또렷해졌다. 내 하루에도 접힌 선이 있을 텐데,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도착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랐다.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로 쏟아졌다가 금방 정리됐다. 바람은 지나갔고, 나는 계단 끝에 멈춰 섰다. 어디에서 시작했고 어디까지 왔는지, 말로 정리할 수 없었다. 대신 바닥에 그려진 방향 화살표를 한참 봤다. 화살표는 분명히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아도 화살표는 지워지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물만 하나 샀다. 병을 손에 쥐자 차가움이 손가락뼈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 느낌을 조금 오래 붙잡았다. 붙잡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만, 오늘 하루가 완전히 흐려져 없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병의 차가움 때문인지, 강의 바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말은 오늘 끝까지 남았다.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켰다.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방 안의 공기는 아침과 같은 냄새였다. 창문을 열지 않았다. 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빈 병을 테이블 위에 세워 두었다. 하얀 라벨이 조용했다. 오늘의 여행은 여기까지였다.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동은 있었다. 그 차이는 지금으로선 크지 않았다. 그렇게 적어 두고,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6) 산문시 — 집 안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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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켜진다. 방은 환해지지만, 마음은 그대로다.

밝아졌다는 사실과 가벼워졌다는 감각은 서로 다르다. 오늘은 다르다 쪽이 많다.


세면대 물을 틀면 얇은 소리가 난다. 손을 적신다. 온도는 가운데.

차갑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뜨겁지 않아서 더 막막해진다.


책상 위 컵은 어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어제 마시던 물의 자국이 가장자리에서 희미하게 말라 있다.

마시지 못한 물은 오늘의 입맛보다 오래 남는다.


창틀에 먼지가 얇게 깔려 있다. 엄지로 그어 보면 선이 생긴다.

선은 생기는데, 그 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모른다.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 선이 오늘은 많다.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꺼졌다 한다. 알림은 조용히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읽지 않은 것들이 쌓인다. 읽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읽어도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시계 초침이 움직인다. 소리는 없다.

움직임이 소리 없이 지나가면, 지나간다는 사실도 얇아진다.

얇아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오늘 하루를 채운다.


옷걸이에 셔츠가 걸려 있다. 소매가 아래로 축 처졌다.

말린 셔츠인데 젖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물로 젖은 것처럼.

몸의 힘이 빠지면 천도 축 처진다. 천이 먼저 배운다.


밥을 씹는다. 씹는 동안만 얼굴 근육이 움직인다.

맛은 올라왔다가 금세 꺼진다. 불이 꺼진 뒤의 프라이팬처럼,

미열만 남아 손바닥을 간질인다. 그 정도의 온기가 오래다.


창밖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멎는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른다.

소리의 앞과 뒤가 붙지 않는 날, 마음은 사이에 오래 머문다.


불을 끈다. 방은 어두워지고, 마음은 그대로다.

어두워졌다는 사실과 무거워졌다는 감각은 서로 다르다. 오늘은 같다 쪽이 많다.

이불을 당겨 올린다. 목까지 덮는다. 숨이 더워진다.

내가 오늘 견딘 건 온도뿐이다. 온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문장 뒤에 점 하나.

점 하나의 무게로 오늘을 닫는다.



(7) 관찰 보고서 — 감각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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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 나

목적: 오늘의 감각을 따라 우울의 자리를 표시한다.

주의: 원인을 찾지 않는다. 느껴지는 것만 기록한다.


[새벽 — 이불의 무게]

눈을 떴지만 몸은 그대로 눌려 있었다.

이불이 무거운지, 몸이 무거운지 구분이 안 된다.

창문 틈에 걸린 어둠이 얇게 남아 있었다. 얇지만 오래 버틴다.


[아침 — 물의 온도]

세면대 물을 틀었다. 손바닥에서 온도를 찾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딱 가운데.

가운데에 오래 머무는 건 생각보다 더 지친다.


[오전 — 화면의 빛]

모니터를 켜니 하얀 문서가 눈앞에 열렸다.

글자는 또렷하지만, 뜻은 멀다.

커서는 깜빡이는데, 마음은 따라 깜빡이지 않는다.


[점심 — 뜨거운 김]

국을 떠올렸다. 김이 얼굴을 스치고 사라졌다.

뜨거움은 분명했지만, 맛은 금방 꺼졌다.

입은 움직였고, 나는 그 움직임을 바라봤다.


[오후 — 바람의 얕은 소리]

창문을 반 뼘 열었다. 종이 모서리가 흔들렸다.

멈추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두었다.

흔들림을 보는 동안에도, 내 안은 그대로였다.


[해질녘 — 길 위의 그림자]

엘리베이터 거울에 내 얼굴이 겹쳐 비쳤다.

피곤하냐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림자와 내가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 불빛의 테두리]

방에 불을 켰다. 밝아졌지만 가벼워지진 않았다.

책상 가장자리에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어 본 선이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밤 — 소리의 빈칸]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가 멎었다.

열어볼 수 있었지만 미루었다. 급하지 않은 소리였다.

미룬다는 사실만 또렷했다. 그 또렷함이 오늘의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부록 — 좌표]

- 손바닥: 물의 가운데 온도

- 얼굴: 김이 스치고 끝남

- 눈: 또렷한 글자, 멀어진 뜻

- 길: 움직였지만 도착하지 않음

- 귀: 울렸다 멎은 소리, 뒤에 남는 빈칸


결론: 오늘의 우울은 원인보다 감각 쪽에 오래 머물렀다.

따뜻함, 차가움, 밝음, 어둠—모두 있었다.

다만 그 어느 것도 나를 통과해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에는 길이 남지 않았다. 표시만 남았다.



(8) 메시지 초안함 — 보내지 못한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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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

“일어났어.”

— 보낼까 말까 하다가 지웠다. 사실은 “깼다”가 맞는 말 같아서. 일어난 건 아니니까.


08:03

“오늘 점심은 밖에서 먹을래?”

— ‘먹을래?’에서 커서를 오래 두었다. 물어본 내가 먼저 맛이 없어진다. 저장 안 함.


09:26

“메일 확인했어. 곧 답할게.”

— ‘곧’이라는 말이 자꾸 빈말처럼 보여서 ‘오늘’로 바꾸려다 결국 닫았다. 알림은 꺼지지 않았다.


10:11

사진(책상 위 종이컵, 반쯤 말라붙은 물자국)

“이 정도면 새 컵을 꺼내야 하나?”

— 사진을 보고 있으니 문장이 더 필요 없는 것 같았다. 보내지 않음.


11:48

“괜찮아.”

— 왜 이 말이 먼저 떠오르는지 알 수 없어서 멈췄다. 누구에게, 무슨 일에 대해, 무엇을 괜찮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취소.


12:17

“밥 먹었어?”

— 쓰고 나니 내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지움.


12:55

“국물은 뜨거웠어. 맛은 잘 모르겠고.”

— 설명 같지만 사실 확인처럼 보이기도 해서, 한 번 더 읽다가 전부 선택 삭제.


13:33

“회의 자료는 다음 주로 미뤄도 될까.”

— ‘미뤄도 될까’ 뒤에 마침표를 찍었다가 지웠다. 찍지 않으면 부탁 같고, 찍으면 이미 정해 놓은 통보 같다. 창 닫음.


14:02

“나는 오늘 좀 조용할 거야.”

— 이 한 줄은 정확한데, 설명을 붙이려 하자마자 흐려졌다. ‘왜냐하면’ 뒤에 아무 말도 붙지 않았다. 미보냄.


14:40

“네가 보낸 링크 열어봤어.”

— 사실 링크를 열었는지, 제목만 본 건지 헷갈렸다. 확인하려고 돌아가다가 손이 멈췄다. 보류.


15:09

“지금 통화 가능해?”

— 가능하면 뭐라고 말할지 준비가 안 돼서, 질문을 접었다. 말풍선이 빈 칸으로 남았다.


16:21

사진(창틀 먼지에 그은 선)

“이 선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네.”

— 너무 우울해 보일까 봐, 아니면 사실 그대로라 더 우울해질까 봐, 둘 다 싫어서 삭제.


17:05

“괜히 미안해.”

— ‘괜히’와 ‘미안해’가 서로를 약하게 만드는 말이라서, 둘 중 하나를 지우려다 둘 다 지웠다.


18:22

“저녁은 패스할게.”

— ‘패스’가 가볍게 들려서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로 바꿨다. 보내지 않고 화면만 껐다.


19:10

“지금 어디야?”

— 상대가 어디에 있든, 내 쪽은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서, 물어볼 이유가 없어졌다. 초안 보관함으로.


20:03

“오늘 노을 예뻤대.”

— ‘예뻤대’ 뒤에 ‘나는 못 봤어’까지 쓴 다음 전부 잡고 지웠다. 못 봤다는 말이 너무 정확해서.


21:17

“괜찮아질 거야.”

—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했다. 내게 하는 말이면 믿기 어렵고, 너에게 하는 말이면 빈말 같았다. 삭제.


22:08

“읽고만 있어.”

— 사실을 적었지만,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덮을 말이 없어서, 사실도 지웠다.


23:11

“내일은 답할게.”

— ‘내일’이라는 단어가 하루를 너무 쉽게 약속하는 것 같아, ‘가능하면’이라는 말을 끼워 넣었다. 그러자 문장이 무너졌다. 취소.


23:54

“여기까지.”

— 이건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메모로 옮겼다. 메신저는 닫았다.


0:07

아무 말도 쓰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자 손바닥에 화면의 미열이 남아 있었다. 미열만은 확실했다.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확실히 느낀 것은 대체로 온도였다.


초안함을 비우려다가, 비우지 않기로 했다.

보내지 못한 말들이 오늘의 흔적이라면, 지우는 일도 말이 될 테니까.

지금은 말을 줄이고 남겨둔다. 빈 칸도 기록이라는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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