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이 꽃대를 올린 지 며칠 만에 드디어 오늘 첫 꽃망울이 터졌다. 곱고 붉은 저 빛깔이 이만큼이나 내 마음을 사로잡을 줄이야…!! 이토록 대견하고 신비로울 줄이야…!!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한가득 미소가 지어진다. 이렇게 뿌듯하고 흐뭇했던 순간이 언제였었나… 싶게 저 작고 여린 꽃송이 하나로 일순간 내 마음에 활짝 활짝 꽃들이 만개를 한다.
곰탱씨 사무실 창가에 가끔 생각나면 물만 주던 못생긴 제라늄이 하나 있었다. 몇 년 동안 분갈이 한번 해준 적 없고 영양제 한번 따로 챙겨준 적도 없었단다. 그래도 녀석은 인색한 그 물만 마시고도 때때로 꽃을 피워냈다. 오며 가며 나도 보긴 했지만, 그 붉은 꽃잎이 휴게실 바닥 여기저기 뚝뚝 떨어져 있어 왜 이런 걸 안 치우고 그냥 놔두냐고 곰탱씨에게 구시렁거리기만 할 뿐 그렇게 핀 꽃이 이쁜 줄도 몰랐다.
그러다 코로나로 사무실 운영도 멈추었던 지난겨울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 물 한 모금 마저도 얻어 마시지 못하고 먼지만 잔뜩 맞은 채, 그야말로 녀석은 한동안 방치가 되었음에도 죽지 않았고 뒤늦게 새로운 사무실 창가로 옮겨졌다.
그즈음 시아버님 병간호를 우리 집에서 하게 되었다. 버겁고 힘들었던 그 시간에 내게 작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창가에 올려놓은 몇 개의 식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때는 길가 풀 한 포기도 이전과 달리 보이던 때라 사무실 창가에서 햇볕 받고 앉았는 그 제라늄도 새삼스레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나이가 많아 가지는 이미 목질화가 된 지 오래였고, 이리저리 맘대로 드러누운 수형이 보기에 분명 이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질화된 가지 끝에 새 잎을 내고 또 거기서 가지가 뻗어 드디어는 작은 꽃망울까지 알차게 달고 앉은 녀석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중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자란 가지 하나를 곰탱씨에게 허락을 구하고 잘라서 집으로 가져왔다.
분리수거통을 뒤져 박카스 병을 하나 찾아 씻고 물을 담아 잎사귀 2~3개만 남기고서 담궈 놓았다. 며칠이 지나자 하얗고 가느다란 뿌리가 내렸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뿌리를 더 많이 내리게 한 뒤, 드디어는 작은 화분에다 옮겨 심었던 것이 작년 이 맘때쯤이다. 나는 녀석에게 '신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뭘 이름까지 붙이냐며 유치해하던 곰탱씨도 삽목 한 것이 생각보다 잘 자라자 “우리 신동이, 우리 신동이” 했다. 내 생각엔 아무리 봐도 제라늄 저 혼자 끈질기게 살아남은 듯한데 곰탱씨는 자기가 키운 엄마 제라늄이 튼튼해서 신동이 역시 잘 자라는 거라며 들여다볼 때마다 으스대곤 했다.
흙으로 옮기고 난 뒤 일 년을 지나는 동안 한여름 무더위에 죽을 고비도 두어 번 넘기고 뿌리파리의 공격도 한차례 당했는데, '신동이'는 정말 그 엄마를 닮은 겐지 끈질기게 버텨냈다. 그렇게 어느샌가 제법 튼튼한 가지를 내더니 오늘은 저리 이쁜 꽃마저 피워낸 것이다. 그러니 안 이쁠 수가 있나, 대견하지 않을 수가 있냔 말이다.
‘신동이’를 비롯해 그동안 크고 작은 화분이 집 안에 꽤 많이 늘었다. 식물을 키우는 것이 이리도 재미가 있고 이토록 내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자칭 타칭 식물킬러였던 이 망손이 돌보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서 새 잎이 돋고 꽃이라도 피우는 날은 내게 경사다. 없던 자존감도 1그램쯤 생기는 것 같으다. 이렇듯 식물을 키우며 활기가 생기니 곰탱씨도 지난 결혼기념일에는 잎이 무척이나 화려한 식물 하나를 선물로 들고 들어왔고, 곰식이 녀석도 작고 귀여운 식물을 안겨주고 입대를 하였다.
맑은 날은 오전과 점심 즈음 거실 식탁 위로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그 햇살이 너무 아까워 집에 있는 식물들을 모두 식탁 위로 올려놓는데 덕분에 식탁 한 귀퉁이에다 점심상을 차리게 된 어느 날, 너무하다 싶었는지 곰돌이 녀석이 툴툴대었다.
“…… 어머니? 이깟 풀떼기들이 저보다 더 소중한 것이죠? 그런 것이죠?”
“어허… 어찌 그리 말을 하는 게냐. 보아라. 쏟아지는 이 햇살이 아깝잖느냐….”
“하오나, 이것들 자리 차지한 것 좀 보시어요. 아주 상전이 따로 없습니다. 제발 이것들 들여다보시는 정성만큼 이 아들도 좀 살펴주시라고요. 예???”
“오~~ 진정 그리 원하는 것이냐?? 오냐~ 이 어미에게는 그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어디 오늘은 우리 사랑하는 아들의 방과 얼굴을 온종일 들여다봐 볼꺼나…”
“……”
엄마가 진짜 그럴까 봐 겁이 나는지 한참 툴툴대던 기세가 사라지고 아무 대꾸 없이 밥을 먹기 시작한다. 나의 소중한 초록이들을 ‘이깟 풀떼기’ 라니… 무엄한 아들놈…..ㅎㅎㅎ.
식물을 기르다 보면 멀쩡하게 잘 자라던 식물이 하루아침에 시들어 버리기도 하고, 통풍과 해충 방제에 그렇게 신경을 써도 어느새 골골 병이 들어 있기도 한다. 남들이 키우기 쉽다고 발로 키워도 된다고 하는 식물은 내게 와서 쉽게 죽어 버리기도 하고, 반대로 키우기 까다롭고 어렵다는 식물이 내 손에서 지금껏 잘 자라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작은 잎사귀 하나만 흙에 꽂아 놔도 꼬물꼬물 새 싹이 올라와 또 하나의 작은 화분을 만들기도 하고, 시들시들했던 잎사귀가 물만 주면 발딱 고개를 들고 일어나 에헤헤~ 활기차게 웃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이 깊어진다. 오늘의 내 일상이 무탈하고 평안하다 하여 영원할 순 없을 것이라는 것. 살다 보면 남들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내겐 수월할 수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남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일들이 내겐 크고 어려운 일로 한참을 곁에 맴돌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문득 또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 그 모든 만물을 지으신 우리 하나님은 그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살다 죽는 일생들을 지켜보시며 얼마나 웃으시고 또 얼마나 우실까 싶은... 베란다도 없는 좁은 거실 창가에 식물들 몇을 키우며 나는 감히 하나님의 마음까지 짐작해 보기도 한다.
여하튼, ‘신동이’를 비롯 오늘도 나의 작은 정원은 무탈하여 내게 활력이 되고 있다. 기분이 좋으니 감사가 넘치고 흥얼흥얼 찬양도 저절로 나온다. 곧 봄이 오는 것을 아는지 겨우내 멈춰 있던 초록이들에게 하나, 둘 변화도 생기는 중이다. 조금 더 풍요로워질 나의 정원은 다가 올 봄이 무척이나 기다려지는 유일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