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들과의 점심약속으로 근처 새로 생긴 일식집에 약속시간 전에 미리 들렀다. 간편하게 인터넷 예약을 해도 될 것이었지만, 가게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고 직접 둘러보고 맘에 드는 좌석과 메뉴를 예약하기 위해서였다.
아담한 가게 규모에 청결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맘에 들었고 무엇보다 응대하는 직원분의 친절함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맘에 드는 좌석을 예약하고 메뉴를 고르는데 딱히 이것이 좋겠다 결정을 짓기 어려워 친절한 그 직원에게 점심시간에 주로 어떤 메뉴가 잘 나가냐고 물었다.
"음... 어르신들은 주로 흰살생선을 좋아하세요. 그리고... " 하며 메뉴판에 나온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찍어 알려주었다. 그 흰살생선 말고도 다른 두어 가지의 메뉴를 더 추천해 주었지만 나는 그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메뉴를 더 추천해 주었는지 하나도 듣지를 못했다.
표정은 일관되게 짓고 눈은 열심히 그 직원이 설명하는 손가락 끝을 따라가며 이따금씩 고개도 주억거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온통 그 "어르신"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귓속은 그 "어르신"이라는 단어가 꽉 틀어막아 먹먹~해진 기분이었다.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 두개골이 그 진동에 웅웅~울리고 있는 느낌까지 들었다.
어르신
어르신
어르신.....
어르신???
예약을 마치고 돌아 나오며 내가 이제 "어르신"이라고 불릴만한 나이가 된 것인가... 아니... 그 직원은 내 나이를 모르잖아... 그렇다면 내 외양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인단 뜻이겠지... 집에 들어와 새삼 한참 동안이나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어르신이라고 불리기엔 억울했다. 나는 이제 50살인데?? 허리도 안 굽었고 쌩쌩히 잘 걸으며 지팡이도 안 들었는데... 머리도 하얗게 안 새었는데... 7,80대 노인분들께나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 어르신이라는 표현이 왜 이렇게 억울하지? 차라리 아주머니라고 했으면 인정하기 쉬웠을까...? 그러면 또 그것대로 기분이 상했으려나? 그냥 손님...?이라고 했으면 이렇게 심각할 건 아니었겠다... 싶다가... 친절했던 그 직원이 나를 존중하고 배려하느라 존대하는 의미로 높여 부른 것은 아니었을까... 내 좋을 대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약속시간이 되어 다시 가 지인들과 식사를 하면서도 음식써빙을 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불러 세워 아까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문득문득 일었다. 별 뜻 없이 한 말에 나 혼자 지금 열폭 중인가... 열폭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지? 어르신과 전혀 상관없는 나이라면 이렇게 단어하나에 심각해질일도 아닌 것을... 그래... 어르신이라고 불릴만한 나이에 근접했다는 거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남들 보기에 나는 폭삭 늙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단 불안함...? 혹시 그것을 나 혼자 모르고 아직은... 아직은... 이러고 젊은 체하고 있는 것인가...? 어르신이라고 좀 불리면 어때. 세상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낯설고 황당스럽지만 인정하면 그뿐. 어쩌면 그 직원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손님보다야 더 나은 표현일 것이다 여겨 어르신으로 불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혼자 추측하고 결론내고 웃고 말았다.
퇴근시간 즈음 혼잡한 버스에 올라탔다.
좌석 옆으로 서서 가는 사람들이 두 줄이나 겹쳐 생긴 매우 혼잡한 버스 안이었기에 안으로 밀치고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두어 정거장만 더 가면 우르르~ 많은 사람들이 내리곤 했던 기억이 있어 그냥 운전기사님 있는 입구 쪽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는데 "저... 여기 자리 있어요."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소리가 나길래 문득 쳐다보았더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어떤 여자분이 나와 눈을 정확히 맞추고 '그래 너한테 하는 말이야'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 저요?"
"네!! 여기 자리 있어요. 여기 앉으세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흘낏흘낏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 아... 저는 괜찮습니다."
친절에 감사하단 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정중히 거절한 다음 얼른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은 휴대폰액정에 고정하고는 그때부터 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앉으라는 자리가 임산부석이던데...
먹는 대로 족족 체중이 늘어 몇 달째 저녁을 굶어보던 나름의 다이어트를 둘째 녀석 휴가 나온 이후 루틴이 깨져 요 며칠 꼬박꼬박 저녁을 배 터지게 챙겨 먹었던 것이 찔리기 시작했다. 배가 존재감 폭발 중인데 내가 또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배가 나와 임산부 같다 해도 임신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비주얼인데... 아니면 혹시 오른쪽에 맨 가방이 아이를 안은 것처럼 보였나?? 아니 아니... 임산부 쪽이 아니라 경로우대였던것일까? 어르신... 그래 나... 어르신으로 불렸었지? 며칠 전 일식집의 그 친절했던 직원이 생각났다. 자리를 양보받을 만큼 나... 진짜 많이 늙어버린 것인가... ??!!!!!
어르신이라고 불렀던 일식집 그 직원도 임산부석 자리를 양보해 준 버스 안의 그 낯선 여자 분도 모두 내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나는 왜 그 친절이 달갑지 않았던 걸까...
잠시 혼란스럽고 생경했던 기분들... 지금은 조금 억울해하며 웃고 말지만 언젠가... 곧장 인정하게 되는 날도 오겠지... 머지않은 시간이라 그녀들의 친절에 지레 화들짝 파르르~~ 했던 모양이다. ㅎㅎ. 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