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킨무무 Apr 26. 2024

19세기 미국, 상류층의 위선의 시대

<순수의 시대>_이디스 워튼, 열린책들








이디스 워튼은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사회에서도 명문 중에 명문인 존스 가문 출신의 여성 작가이다. 당시의 상류층 여성은 일찍 사교계에 데뷔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그녀의 작가 데뷔는 그네들의 전통과 관습에 따르면 깨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 탓인지 그녀의 작품에는 모두 여성의 순수함과 순종을 강조하는 전통적 교육과 이른 결혼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중 <순수의 시대>는 뉴랜드 아처라는 상류층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으로 시종일관 그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진보와 파격을 열렬하게 원하나 전통과 안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유약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성난 기세로 몸을 홱 돌려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여자들도 자유로워야 해요. 우리들만큼 말이에요." 그가 단언했다."p.46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혼 또한 주변 대부분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일방의 무지와 일방의 위선으로 유지되는 무미건조한 물질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결합이 될 거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p.48

"그는 <양갓집> 여자들은 몇 살이 되어야 자기 말을 하게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몇 살이 되어도 불가능할 거야, 우리가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p.84

작품의 초반에 보여주는 그의 진보적 발언들은 엘렌을 만나면서 훨씬 강렬해진다. 그에게 있어 엘렌은 진보와 파격의 '진짜' 삶을, 아내 메이는 전통과 관습에 따라 사는, 안정적이나 '가짜'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뉴욕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 반항하며 엘렌과의 이상적 사랑의 도피를 꿈꾸던 그의 강렬하고 순진한 욕망은 엘렌의 현실적인 발언과 메이의 치밀한 물밑 작전에 의해 꾸무룩하게 힘을 잃고 만다. 아니, 여성들에 의해 좌절되었다기보다는 그 스스로 포기한 것에 가깝다.

"아무도 다르게 살려고 하지 않아. 다르다는 걸 천연두처럼 두려워해."p.151

"그가 속한 소규모 부족의 예절과 관습에 관련된 모든 것이 세계적인 중요성을 지닌 듯이 여겨진 때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딘가에는 진짜 사람들이 살았고 진짜 일들이 일어났지...'"p.178

안정적 현실의 삶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두려움은 지금껏 견고하게 쌓아온 전통과 관습을 깨고 싶다는 욕망을 이겨내고 만다. 이는 결국 아처는 잃을 것이 많은, 다시 말하면 기득권 남성으로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층민이었다면 인생을 담보로 한 도박과도 같은 개혁을 꿈꾸었을 것이나 이미 실버스푼을 쥐고 태어난 그가 외쳤던 진보와 개혁이란 한낱 가진 자가 젊은 날의 치기로 뱉어본 공허한 정의와 순수에 불과할 뿐이라는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의 시대>라는 제목 역시 매우 흥미롭다. 메이의 캐릭터성의 근간을 이루는 순수라는 단어가 당대 상류층 여성들에게 강요되고 교육된 무지의 순수, 혹은 위선과 가식으로 위장한 순수라는 부정적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줌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제목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아처가 주인공임을 주목한다면 아처가 나이 들어 그 스스로의 삶이 전통과 전형의 상징이 되었을 때, 현실을 제쳐두고 이상과 진보를 부르짖던 그의 젊은 시절을 <순수의 시대>로 회고한다고 해석해 봄 직도 하다. 그렇게 따지자면 결국 엘렌과의 해후를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서는 엔딩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엔딩이 있을까 싶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신사로서의 우아한 엔딩인가, 아니면 그가 한때 비난해 마지않았던 상류계급의 전통과 명예를 끝내 버릴 수 없었던 비겁한 자의 엔딩인가. 해석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의 이전글 제주 4.3의 백비에 뭐라고 새겨야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