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부정하는 정령이외다! 그것도 당연한 일인즉, 생성하는 일체의 것은 필히 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생성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죄라느니, 파괴라느니, 간단히 말해서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내 본래의 특성이랍니다."1권 p.88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 중에서
"지나갔다는 것과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영원히 창조한다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창조된 것은 무 속으로 쓸려들어가게 마련이다! "지나가버렸다!" 여기에 대체 무슨 뜻이 있느냐? 이거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데도 마치 뭔가가 있는 것처럼 뱅뱅 맴돌고 있구나. 그래서 난 오히려 영원한 공허를 좋아한단 말이다."2권 p.433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 중에서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권 p.432파우스트의 대사 중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청년 괴테의 혼란을 투영했다면 <파우스트>는 죽음을 앞둔 노인 괴테의 회고록이다. 파우스트는 학자로서 정점을 찍고 세상의 모든 지식에 가까워진 사람이지만 여전히 앎에 대한 갈증에 시달린다. 그러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 자신의 영혼을 걸고 모종의 계약을 하게 된다. 요컨데 세상의 모든 희비극을 경험하게 해줄 터이니 더이상 추구할 바가 없는 온전한 순간이 온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영혼을 건네겠노라 하는 것이다.
1부는 마법으로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와 하층민이었던 그레첸의 만남, 연애가 주 줄거리를 이룬다. 괴테는 본디 풍족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반대로 가난하고 단촐하지만 정돈된 타입에서 매력을 느꼈다는데 그레첸과 그레첸을 둘러싼 환경 설명이 그의 취향에 딱 부합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인생재체험 ver. 1.0의) 사랑을 위해 그레첸의 어머니와 오빠가 죽게 되고 아이를 비롯해 그레첸 역시 희생된다. 인생의 희노애락, 욕망과 번뇌를 모두 겪었으니 무엇이 남았으랴. 공허다.
2부는 황실로 자리를 옮긴다. 황제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명예를 얻고 급기야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헬레나와 파리스를 소환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기독교적 악마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의 콜라보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런 파격적인 컨셉이라니!(역시 천재만재괴테) 또한 1부에서 못다이룬 사랑을 2부에서 다시 한 번 도전하는 파우스트다. 상대는 신화상 미모의 끝판왕인 헬레네. 게임끝났지, 뭐. 그녀와의 행복한 연애, 결혼, 출산을 경험하였으나 아들이 먼저 죽자 헬레네 역시 그를 따라 하데스의 세계로 가버린다. 또다시 환희와 행복, 고통과 고뇌를 한꺼번에 겪은 파우스트이건만 이번에도 역시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악마이면서 파우스트의 또 다른 자아다. 그는 줄곧 인생이란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이니 차라리 무존재가 낫다고 주장한다. 모든 학문에 통달하여 허무함을 깨달은 괴테의 또다른 목소리인 셈이다. 이에 반해 파우스트는 여전히 깨우침에 목마르고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고통스럽게 이별하면서도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간척사업을 진행하며 사람들과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추구할 바 없는 온전한 순간을 맞이하여 소리친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그토록 아름답구나!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허무와 공허에 빠지지 않는 자기 생에의 긍정은 현대인이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너무 많이 알아 불행한 우울의 근원적 파훼법이랄까. 잘난 나를 따라해봐, 라는 식의 21세기 자기계발서 따위는 집어치우고 19세기 교양서적 <파우스트>를 읽자. 머리가 팽팽 도는 것만 같은 그리스 신화와 낭만적이고도 고전적인 마녀들의 밤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