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세의 생일을 맞이한 롤란트는 학생들과 동료들이 헌정한 기념 문집을 받아 들고 소회를 밝힌다. 인생의 전기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세밀하게 잘 정리된 문집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신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젊은 날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독자인 우리는 주인공의 고백을 따라 19세의 롤란트가 되어 말 그대로 감정의 혼란, 그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것이 첫 감상이다. 채 여물지 않은 소년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우리 역시 혼란을 겪는다. 두 번째 읽고는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 생각해 본다. 예술과 문학에로의 열정, 충만한 만족감의 작동 메커니즘 역시 인간 사이의 사랑의 그것과 별 다를 바 없으리라. 혹은 예술로의 사랑을 위시하나 그것 역시 성애를 동반한 흔한 사랑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되짚어보고 확신할 수 있었던, 인생의 다양한 모먼트 속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운명의 순간의 여운이 두고두고 남는다. 본디 인생이란, 그리고 청춘이란 그때에는 모르고 시간이 아주 흐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드린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순간, 오직 한 번 뿐입니다."p.17
"난생 처음으로 나는 라틴어로 '랍투스(순간적으로 밀려오는 황홀한 심리적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부르는 것, 즉 한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초월해 이끌려가는 상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휘몰아치는 입술은 자신을 위해서 말한 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몸 속에서 불이 일어난 사람 내부의 화염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p.38
"그의 생활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근원과 마음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 채 미궁에 갇힌 것처럼 제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p.91
"순수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남자의 열정이 한 여인에게 향하게 되면, 그 열정은 무의식 중에 육체적인 결합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자연은 서로의 육체를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결합을 이루도록 정열을 아로새겨 놓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정신의 열정, 충족되지 않은 그 정열은 어찌해야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p.109
"그녀의 고백은 그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낀 내 감정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종잡을 수 없는 증오를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이라도 하는 듯 행동했던 것입니다."p.167
"그리하여 한 인간이 인생에 단 한차례, 한 인간만을 위해 말하고는 영원히 침묵한 것입니다. 마치 죽어가면서 딱 한 번 쉰 목소리로 소리쳐 노래 부른다고 알려진 백조의 전설처럼... 그의 목소리를 나는 떨면서 고통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한 여자가 남자를 자기 몸속에 받아들이듯, 뜨겁게 토해 나온 불이 밀려드는 것처럼..."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