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작가의 단편집으로 어느 정도 세계가 겹쳐져 있는 부분이 있어 연작소설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야기들은 모두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대충 뭉뚱그려 말하자면 수치와 염치로 주제를 모아 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를 살펴 보자면 화자인 김숙희는 남편의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에 수치를 느낀다. 바람을 피운 자신을 모른 척 덮어주고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헌데 이 수치는 혐오로 이어져 결국 남편을 살해하고 만다. 한편 박창수는 그녀가 한참 후에 만난 한량으로, 술과 노름으로 숙희를 괴롭히는 존재였으나 그녀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무조건적인 포용과 환대를 겪고 성실하고 염치를 아는 인물로 변모한다. 수치가 혐오가 아니라 염치로 바뀐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의 인터뷰어는 용산철거 참사에 대한 글을 쓰려는 소설가이나 차마 직접 현장에 있던 크레인 기사를 취재하지 못하고 출동하지 못했던 나정만 씨를 인터뷰한다. 나정만씨는 당일 출동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얼마간의 안도와 동시에 얼마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참사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생계에 위협이 될까 저어하는 마음이 이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을 만든 것이다. 인터뷰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 이 상황에 수치심을 느낀다.
세상에는 두 가지 타입의 인간이 있다. 수치와 염치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다시 말해 양심의 무게를 느끼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518 유족이 세월호 유족과 함께 하고 이태원을 지키고, 또 그들이 제주항공참사 유족을 위로하는 한편, 정치적 이용을 위해 희생자들을 매도하고 악플을 다는 사람이 있다. 남태령에서 긴긴밤을 농민과 함께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통령 체포를 막기 위해 관저 앞에 드러눕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수치를 알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수치를 분노와 혐오로 바꿀지, 염치로 바꿀지는 결국 우리가 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