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같은 사랑, 사랑 같은 병

<환상통>_이희주, 문학동네

by 피킨무무





<사랑의 세계>, <성소년>의 이희주 작가의 데뷔작. 팬심을 넘어선 짝사랑, 아니 짝사랑보다는 누군가에 매혹된 상태를 그려낸 이 작품은 병적이고 광기 어린 사랑 역시 사랑의 한 종류임을 말한다. 나 역시 중학교 때부터 끊임없이 덕질을 해온, 덕질 유전자 보유자로서 독서 중 얼마나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던가, 이거 좀 내 이야긴데? 하하핫.


작품은 3부로 나뉘어 각각 m, 만옥, 민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모두 ㅁ으로 시작하는, 글자모양처럼 고립되고 갇혀진 사랑을 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이 사랑의 끝에 허무만이 남는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사랑은 고귀하고 달콤하며 운명처럼 주어진 이 사랑을 거부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흔한,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사실 보통의 사랑보다 팬걸의 사랑은 얼마나 희한하고 존귀한가. 영상과 사진이라는 불완전하고 왜곡된 매체를 통한 만남, 오프를 뛴다 하더라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헌신과 추종. 맹목적인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은다면 대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어딘가 비틀린, 환희와 고통이 함께하는 이희주 세계의 출발점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녀가 스물다섯에 썼다는(세상에나 만상에나!) 이 작품을 만나보자.


"나는 어린 남자들을 사랑했다. 그것은 내가 유아기 때나 청소년기, 그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한결같은 취향이다. 나는 늘 같은 나이 대의 남자들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그들을 어린 남자라고 지칭하는 것은 나의 시간이 흘렀음을 반영하는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사랑한 남자들은 언제나 육체적으론 가장 아름답고, 정신적으론 불안정한 시기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리석고, 맹목적이며,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했다. 취향이 없고, 말이 많으며, 언제나 노골적으로 애정을 갈구했다. 나는 그 눈멂을 무척 사랑했다."p.41


"그러나 내가 있는 곳은 가장 낮은 곳, 추락한 죄인들이 손을 뻗었지만 누구도 거미줄 하나 내려주지 않았다. 죄인들은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알고 있는 천사의 이름을 외쳤다."p.93


"밤이 깊었고 얼마 뒤면 진짜 눈이 내릴 터였다. 그러나 흩날리는 가짜 눈을 맞으며 나는 아름다운 것엔 언제나 속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차갑지 않고 아름답다면 그게 더 나은 건지도 몰랐다."p.128


"응, 그것도 굳이 말하자면 사랑이겠지. 병 같은 사랑. 사랑 같은 병. 야, 넌 뭐 사랑이 고귀한 건 줄 아니. 그런 개 같은 것도 다 사랑이지."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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