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_스티븐 프라이, 현암사

by 피킨무무






수많은 신화들 중에 가장 사랑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리스 신화, 대체 무슨 연유로 수많은 문학 작품과 일상에서 변형되어 인용되는 걸까? 신들의 이야기라기에는 인간을 너무나도 빼닮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명하는 우리에게 프라이는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매력적인 신들의 세계를 풀어내어 보여준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신비와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시작되었을 구전 신화는 자연에 대한 고대인들의 경외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게다가 인간세계의 도덕률을 보란 듯이 깨버리는 신들의 잔혹하고도 무자비한 행태와 함께 인간의 감정과 갈등요소를 그대로 복사한 듯한 신들의 모습은, 역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신을 우리의 모습으로 창조했음을 반증하기에 매우 흥미롭다.


수많은 친숙한 이야기들 중 인상 깊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첫째는 에오스와 티토노스의 이야기다. 에오스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인 아레스와의 밀회를 들킨 이래로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는다. 바로 아프로디테가 주관하는 사랑의 영역인 연애사에서 끝없이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는 운명을 선사받은 것이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결국은 찾아올 새로운 날에 대한 희망을 뜻하기에 계속되는 파국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약속과 새로운 기회를 믿는 것이 아이러니하며 이는 어리석은 인간의 사랑에 대한 비극적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그녀는 어느 날 아름다운 인간 청년 티토노스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인간의 유한한 삶을 걱정한 나머지 제우스를 찾아가 연인에게 영원불멸을 선물해 줄 것을 간청한다. 전능한 신들의 세계에도 다른 신들의 힘에 서로 간섭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일까, 제우스는 티노토스의 영원불멸을 약속하긴 하나 말장난처럼 그의 노화를 막지는 않는다. 이후는 쉽게 상상할 수 있겠다. 에오스는 영원히 젊고 아름다웠고, 티노토스는 늙고 약해졌으나 죽지 못했다. 연인의 죽지 못해 사는 고통을 지켜보던 에오스는 결국 둘 모두 견딜 수 없다 느껴졌을 어느 저녁, 티노토스를 메뚜기로 변신시키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보낸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이별(?)의 정석이며 훗날 수 만 번 반복될 사랑의 테마이고, 아프로디테의 복수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여러 여름 뒤 백조가 죽는다

나만 홀로 잔혹한 불멸의 운명에

파괴되어 간다. 나는 그대의 품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간다

여기 고요한 세상의 경계에서,

백발의 그림자가 꿈처럼 방황하며...

(...)

신들은 그들이 준 선물을 취소하지 못하니.

_앨프리드 테니슨, <티노토스> 중에서" p.402


둘째는 앞서 복수에 성공하여 웃었던 아프로디테가 반대로 눈물 흘리게 되는 이야기로, 돌고 돌아 자승자박처럼 그녀에게 비극으로 작용될 밑그림은 이렇게 시작된다. 크프로스 섬의 테이아스 왕의 기도와 제물이 성에 차지 않았던 아프로디테는 옹졸하게도 테이아스의 딸 스미르나에게 아버지를 사모하는 근친상간적 연정을 불어넣는다. 또한 거기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스미르나의 시녀 히폴리테에게 마법을 걸어 술 취한 테이아스의 침대에 스미르나를 집어넣게 한다. 밤의 어둠과 취기를 빌려 탐욕스러운 정사를 치른 테이아스는 이 미스터리 한 여인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사랑의 격정을 해소하였으나 근친상간에 대한 죄의식은 해소하지 못한 스미르나는 신들에게 자비를 구하며 달아난다. 이것을 가여이 여긴 신이 그녀를 몰약나무로 변신시켜 주었고 그녀는 열 달 후 출산하였으니, 그 아이의 이름이 아도니스, 그 말 자체로 미소년이다.


어찌 보면 그의 탄생을 아프로디테가 점지한 셈임에도 불구하고(이마 짚), 아프로디테는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 연인이 된다. 수많은 신들이 이 연인을 곱게 보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다.(특히 아레스는 질투폭발) 아프로디테는 혹여 다른 신들이 그녀의 연인에게 해코지를 할까 두려워, 사냥을 좋아하던 아도니스에게 작은 짐승은 괜찮으나 사자, 곰, 멧돼지, 큰 사슴(신들의 변신모습일지도)만은 절대 욕심내지 말라 당부한다. 그러나 역시나 그녀의 간절한 충고를 귓등으로 들어 넘긴 아도니스는 멧돼지(아마도 아레스)를 뒤쫓다 엄니에 배를 찢겨 죽게 된다. 미소년은 죽음 또한 아름다워 그의 피와 아프로디테의 눈물이 섞여 떨어진 곳에 짙붉은 아네모네가 피어나게 되니, 그것은 바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따왔다. 바람이 불면 금세 꽃잎이 날아가버릴 정도의 여리여리한 이 꽃은 속절없고 덧없는 젊음, 아름다움, 사랑의 속성을 말하는 듯하다.


소개한 두 이야기에 모두 아프로디테가 진하게 엮여있다는 것은 역시 그녀의 상징인 젊음, 아름다움, 사랑에 진하게 엮이고 싶다는 나의 변태적(?) 기저심리를 드러내는 것이려나. 인간세상에서는 허무하게 덧없이 사라질 그 무엇들이나, 그렇기에 소중하고 반짝이는 한 철의 아름다움을 사랑한 그리스인들이여, 절 받으소서. 수 천년을 관통할 통찰력을 이토록 재미난 썰로 풀어낸 당신들의 능력에 경의를!



"그리스 신화는 인간 생활과 문명에 대한 신들의 학대와 간섭, 폭정에서 벗어나려는 인류의 투쟁과 같은 궤도를 그린다. 그리스인들은 신들 앞에 비굴하지 않았다. 탄원과 공경을 바라는 신들의 허영심을 알았지만, 인간이 신과 동등하다고 믿었다. 그리스인들의 신화는 잔인하고 경이롭고 변덕스럽고 아름답고 무모하고 불공평한 이 황당한 세상을 창조한 자들의 성정이야말로 잔인하고 경이롭고 변덕스럽고 아름답고 무모하고 불공평했음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이미지로 신들을 창조했다. 호전적이지만 창의적이고, 현명하지만 사납고, 다정하지만 질투 많고, 자상하지만 잔인하고, 자비롭지만 복수심에 불탄다."p.13


"이런 신화들은 가끔 '인과관계'를 설명해 준다. 그러니까 세상이 지금의 모습으로 굴러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셈이다."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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