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_매들린 밀러, 이봄
"인간들은 시시각각으로 죽었다. 난파당하거나 칼에 맞아서, 사나운 인간에게, 병이나 부주의나 노령으로. 프로메테우스도 얘기했다시피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사연이었다. 살아 생전에는 아무리 활기 넘쳤어도, 아무리 눈이 부셨어도, 아무리 경이로운 업적을 남겼어도 결국은 먼지와 연기 신세였다. 반면에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더라도 신은 별빛이 꺼질 때까지 계속 환한 공기를 마실 것이다."p.206
태양신 헬리오스와 님프 사이에서 태어난 키르케는 그 혈통을 제외하고는 어떤 능력도 없기에 신들의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하급 신이다. 작품의 초반 어떻게 해서든 신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유년기(?)는 어쩜 그리 인간의 그것과 비슷한지.
감히 인간에게 불을 전하여 문명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제우스의 분노를 피할 후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와의 짧은 만남에서 그가 건넨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p.34다는 이야기는 이후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메아리가 된다.
작품 속 그리스로마 신들은 인간사에 잔혹하기 이를 데 없고 이것은 신들의 사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키르케는 제우스와 헬리오스의 화합의 희생양으로 무인도에 유배되어 영원히 외롭게 살아가야 할 운명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신으로서 주어진 전능함이 아닌 스스로 연구하여 주술과 묘약의 이치를 깨닫게 되니, 그녀가 문학사 최초의 마녀다.
이미 모든 것을 갖추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여타의 신들과 달리, 실패와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키르케의 이야기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아도 매력적인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여성이 기존의 틀 안에 순응하면 무시받기 일쑤고 그렇다고 틀을 깨고 나오면 흔히 마녀로 매도당한다는 이야기는 예로부터 변형되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이야기의 원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다, 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굳이 신일 필요는 없다, 까지 나아간, 인간의 유한함에서 비롯되는 삶의 에너지와 성장을 사랑한 매력적인 여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잡솨보시길. 음의 고저 없이 건조하게 읽혀지는 서술문체임에도 흡인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을 보면 매들린 밀러는 이야기꾼이 틀림없다. 개인적으로는 <아킬레우스의 노래>보다 좀 더 재미나게 읽었다.
"바닷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p.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