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걸작선 3대 비극작가 대표선집>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대략 기원전 500년, 그러니까 2500년 전의 작품이다. 우와, 시간의 길이도 길이거니와 어쩌면 인간 이야기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신기하게도 (옛날 희곡의 방식이 낯설어서 초반만 극복하면) 몰입이 잘되고 재미있다. 옮긴이는 그리스 비극을 소개하며 대표작가로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 소포클레스(기원전497~406) 그리고 에우라피데스(기원전 485~406)의 작품을 각 2편씩 실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비극 경연대회에서 다수의 우승을 차지한 유명작가로서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경우는 배우의 수를 두 명으로 늘리고 코로스의 역할을 줄여 대화가 중심이 되도록 하여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로 꼽힌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최대 걸작 <오이디푸스 왕> 하나면 설명이 끝날 듯.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더불어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불신과 전쟁의 비극을 다룬 진보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작품을 꼽아보자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다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순이다. 이 작품들은 당장 현대극으로 올려도 손색이 없을만한 완성도와 재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오이디푸스 왕>은 말해 뭐해, 그냥 완벽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새 왕이 되어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자 그 이유로 선왕 라이오스가 살해되었으나 진범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신탁을 듣고 살해범을 잡고자 열의를 불태운다. 그러나 전에 길에서 시비가 붙어 죽인 노인이 라이오스임이 밝혀지며 스스로 저주했던 진범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오카스테 왕비는 이를 먼저 눈치채고 자살하며 오이디푸스는 제 눈으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테바이를 떠난다. 한 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뿜는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와 동시에 절망과 비극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고상함까지를 보여준다.
<메데이아>는 영웅 이아손과 그에게 반한 이민족 메데이아 공주의 이야기다. 메데이아는 헌신적으로 이아손을 사랑하여 그의 성공을 도와 자신의 고향 콜키스에서 추방당한다. 아들 둘을 낳고 몇 년동안을 행복하게 지냈으나 곧 이아손은 가족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다는 이유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과 몰래 결혼하려고 한다. 이 배신을 알게 된 메데이아는 절망하고 설상가상으로 메데이아가 해코지 할까 두려웠던 크레온은 그녀를 코린토스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애걸복걸하여 추방 전 하루의 말미를 얻은 메데이아는 그 하루동안 복수를 실행한다. 독이 묻은 장신구와 옷을 결혼선물로 보내어 크레온과 그의 딸을 죽이고 이아손을 자식 잃은 아비로 만들기 위해 아이들마저 죽인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처럼 종종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자식을 죽이는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자해조차 서슴치 않는 증오의 마음이란 인간이 가진 본성이려나. 복수를 위해 자신을 갈아 넣는 이야기가 안타까우면서도 감정이입이 되는 이유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받아들인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왕위를 넘기며 자신의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달라 부탁한다. 그러나 비극적 운명은 그의 아이들도 비켜갈 수 없었다. 위의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 둘은 일대일 결투에서 서로를 죽인다. 그 중 폴뤼네이케스는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죄로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하는 벌을 받는다. 여동생 안티고네는 그러한 명령에 불복하여 죽은 오라비의 장례를 치러주다 잡히고 만다. 그녀는 혈족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신들의 불문율이라 주장하나 크레온은 가차 없이 그녀에게 사형을 내린다. 그녀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이 크레온을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하이몬은 자살하고,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왕비마저 자살한다. 타인에 대한 연민 없는 가혹함이 더할 수 없는 큰 비극으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인간사의 원리를 보여주는 셈.
이 이야기들은 슬프고 잔인한 비극의 원형으로 현재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모티프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인간은 그 다양한 변주 속에 원형을 궁금해한다. 이 책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종합예술인 비극으로 구현해 낸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의 걸작들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