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의 리부트라 할 수 있다. 모든 뼈대는 같지만 원작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에게 몰빵한 느낌이라면 투르니에의 작품에서는 방드르디의 역할이 로빈슨 못지않게 매우 확대된 느낌이며 그에 따라 엔딩과 더불어 작품의 지향점도 달라진다. 2차 창작물을 쓰려면 역시 이 정도는 써줘야 한다.
"그는 이제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코를 처박은 채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먹었다. 그는 엎드린 채 변을 보고, 자신의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배설물 속에서 뒹굴었다."p.48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갑작스런 난파로 인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문명인이 인간의 사회에서 갑작스레 떨어져 나와 고독의 삶을 영위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몇 단계의 '변신'을 거치는 그의 변화는 마치 인류의 진화과정을 28년의 표류생활로 압축시켜 놓은 듯하다. 위 인용문은 문명의 세계에서 원시의 세계로 급낙하한 로빈슨의 퇴화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앞으로 있을 그의 변신을 더 극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그는 처음에는 '탄식의 섬'이라 무인도를 명명하고 절망에 빠져 모든 의욕을 잃고 인간성을 신속하게 상실한다. 사족보행의 동물에 가까운 인류에서 진화를 거듭하여 후에 '스페란차(희망)'라고 섬에 새 이름을 부여한 그는 이 스페란차의 초대 총독이자 유일한 시민으로서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다. 그가 가진 문명화가 인간성을 확보해 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하게도 원주민의 희생양이 될 뻔한 방드르디를 구해줌으로써 마침내 고독의 늪에서 벗어나게 된다. 처음에는 주종의 관계였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그동안 이룩해 놓았던 문명 세계를 폭파시키면서 둘의 관계는 변화하게 된다. 방드르디와 야생염소 앙도아르와의 대결에서 로빈슨은 생명력 넘치는 원시성과 야생적인 자유를 배우게 되는데 이는 문명화만이 인간성을 담보해 주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방드르디가 로빈슨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후에 문명에로의 귀환 기회가 생겼을 때 그것을 반려하고 스페란차에 남을 것을 결심한다.
고독 속의 사유가 철학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과거에서 미래로 인류는 어떤 지점을 지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매우 흥미로운 탐구를 담아낸 작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속에 담긴 인류라는 표본에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대상 여성이 무인도 표류를 경험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곧 남성의 역사라고 말한다면 반박할 자신은 없다. 다만 섬이 가진 풍요와 앙도아르로 만든 하프나 연이 여성성을 상징하고 로빈슨이 그 여성성을 포용하여 미래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문명화만을 인간성을 지키는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또 다른 다양한 인간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 바로 처음에는 미천한 노예라 여겼던 방드르디였던 것이다.
또한, 방드르디가 떠남으로 늙고 절망에 빠졌던 로빈슨이 자신을 찾아온 자안으로 인해 다시금 왕의 젊음과 위엄을 되찾는 마지막 장면은 로빈슨의 입장에서야 해피엔딩인데 죄디라 새로 이름을 부여받은 자안의 경우도 그러할지는 미지수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가 작품 내에서 그다지 선한 의도로 그려지지 않았던 전적이 있기 때문일까? 자안은 로빈슨을 구원하였나 로빈슨은 자안을 구원하지 못했으리라. 방드르디에게 그러했듯, 스페란차 섬은 로빈슨의 희망이지 자안의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