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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Dec 15. 2023

투명인간의 삶

<투명인간>_성석제



서른 명이 넘는 화자가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이처럼 다자의 시점을 이용하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상의 단면을 매우 폭넓게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치 '시대의 인터뷰' 같은 느낌이랄까?


또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그 수많은 시점들 속에 주인공 만수의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만수의 인생은 오로지 김만수의 주변인의 시점으로만 이야기된다. 타인이 보는 나는 존재하나 정작 나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삶, 바로 투명인간의 삶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는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p.365


라고 최초이자 최후로 자신의 목소리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라 믿고 싶은 그의 착각에 가깝다. 그의 가족은 '훌륭하고 고귀'하다기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며 그런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그의 삶이 '진짜'라고 믿는 것은 그가 한국 특유의 가족주의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희생의 굴레에 갇힌 탓이다.


그의 맹목적인, 소시민으로서의 성실함, 가족에의 헌신을 과소평가할 순 없겠으나 지나친 운명에의 순응, 자기희생, 체제의 부당함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까지에 이르면 그는 통째로 자신의 삶을 착각한 채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격변의 시대, 사회적 담론이나 역사적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가족에게 매몰된 삶. 개인의 성실함(특히 사회적 성찰이 결여된)이 반드시 공동의 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인물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철저한 자기기만으로 읽히는 스티븐스의 엔딩에 비해 만수의 그것은 시대의 희생양에 가깝기에 좀 더 안타깝고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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