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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Feb 20. 2024

혼란한, 그러나 제법 있을 법한 세상

<있을 법한 모든 것>_구병모, 문학동네




장황하고 독특한 낱말 간의 조합, 긴 호흡의 문장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병모 작가의 단편집이다. 여기에 혼란한 세계관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끼얹어본다면? 다소 난해하지만 작가 특유의 이야기 줄기의 재미가 있다.


<노커>, <이동과 정동> 같은 작품은 코로나 19 시대의 잔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고립, 개인화, 파편화된 일상, 구체적 대상이 정립되지 못한 공포의 세계관이 깔려 있달까.


가장 좋았던 작품은 <니니코라치우푼타>. 따뜻하고 유머스러운 이야기로 국민 중위 연령 61세의 머지않은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시간 속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시간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인지의 성체속에도 여전히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가 타닥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째 딸보다는 어머니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는 현실에 대한 슬픔이 바늘 끝 정도의 아픔으로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는 중에, 그래도 딸로든, 엄마로든 내게는 이런 일이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염려와 함께, 혹시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마지막 사랑의 기원만은 끝까지 잊지 않길 바라는 희망을 함께 띄워본다.(문체를 따라 해보려다 대차게 망함, 역시 작가는 다르다구!) 오묘한 가족애에 귀여운 로맨스(이게 된다고?)를 더한 사랑스러운 글.


"수없이 흥행에 실패한 SF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들, 그 어느 장르보다 고난도의 특수 분장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대체제가 넘쳐나는 영화들 사이사이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 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체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던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p.60 <니니코라치우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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