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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Mar 21. 2024

이야기와 형식의 찰떡궁합

<인형의 집>_헨릭 입센, 문예출판사



"노라: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의 생활은 초라한 거지로서- 단순히 손에서 입으로 옮겨진 것뿐이었지요. 저는 당신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하고 그 대신에 밥을 얻어먹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니까요, 톨발. 하지만 당신이 저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당신과 아빠는 큰 죄를 저질렀어요. 제가 자라지 못한 것은 당신들 탓이에요."p.143


"헬멜: 노라,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할 수가 있소. 당신을 위해서라면 슬픔과 가난도 견딜 수가 있소. 하지만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자기의 명예를 희생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오.

노라: 수많은 여인들은 희생을 해왔어요."p.150




1800년대 후반에 쓰여진 이 희곡은 그야말로 극적이다. 말 그대로 연극의 대본인만큼 거실로 세팅된, 좁은 무대에 오른 연기자들이 관객석을 향해 내뱉는 대사와 호흡이 세밀하게 상상이 된달까.


쉴 새 없이 종달새와 다람쥐를 찾아대는 조련사 헬멜의 두꺼운 목소리, 껄껄거리는 웃음, 굵은 손가락에 얽힌 서류종이들의 부대낌. 종달새를 자처하며 헬멜의 가슴팍에 날아안기는 노라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종달새 여기 갑니다~오호호, 내게 2막의 엔딩이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나 보다. 작품 내적으로도 2막의 엔딩은 3막과 그것과 대비되어 노라의 각성을 또렷하게 드러내어주는 극적인 장치다.), 드레스 자락에 나부끼는 레이스와 대사를 칠 때 그녀의 손가락의 각도까지도 상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문제의 3막에서 침착함을 되찾은 노라의 응축되고 냉정한 분노와 그에 따른 결단, 그 실행력은 우와, 개머시써.(비속어를 자제하려고 했으나 이 느낌을 대체할 표현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혹시나, 하는 헬멜과 관객의 기대를 와장창 부숴버리는 쾅-하는 문소리까지 이 아니 완벽할 수가.


이 이야기가 소설이나 에세이로 쓰여졌다고 상상해 보라. 노라의 내면 심리나 행동을 구구절절 묘사하는 것보다 대사와 지문, 음향효과로 간결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메세지를 독자의 눈앞에 직접 펼쳐내보여 전달하는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방법이다.


혹자는 엔딩을 비현실적이라거나 비윤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당대의 여성들에게 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었고 실행할 수 없었던 선택지를 열어준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또한 희곡의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작품을 읽은, 혹은 극을 본 모든 여성이  노라가 되어 노라의 대사를 내뱉는, 간접체험을 하게 만드는  작가의 기교와 기술이 진정 탁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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