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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Apr 13. 2024

인간이여, 부디 따뜻하고 부질없으라

<다섯째 아이>_도리스 레싱, 민음사






 여기 자신들의 이상을 현실로 만든 부부가 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들은 런던 교외의 커다란 3층 주택을 사고 바라던 대로 아이들을 넷이나 가졌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휴일에는 이 큰 집이 친척과 친구들로 붐빈다. 그들은 먹고, 놀고, 휴일을 즐기고, 가족에게 애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사랑과 이상만으로는 이 모든 일을 처리해 낼 수 없다. 저택구입비의 일부는 데이비드가 절대 의지하고 싶지 않았던 부자 아버지의 주머니를 빌렸으며 네 아이들의 육아는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휴일을 즐기다 가는 친척들에게 소요되는 비용 역시 그들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었기에 부자 아버지의 찬스를 또다시 사용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이상적인 가정은 대충 잘 굴러가는 것 같기에 모두 그럭저럭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면서부터 분위기는 반전된다. 다섯 번째의 임신 소식은 여성으로서의 해리엇에게도, 부모로서의 데이비드에게도, 육아를 전담했던 도로시에게도 심지어 작품 밖 독자에게까지 공포로 다가온다. 이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오던 행복이 기어코 깨지겠구나, 하는 예감을 강하게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가져야 마땅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채 태어난 벤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아이는 가족에게 한 번 버림받았고, 돌아온 이후에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으로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첫째는 인간이 숭상해 오던 많은 전통적 가치의 허상이다. 화목하고 이상적인 가족, 어떤 상황에서도 모성애를 잃지 않는 자애로운 어머니, 우애 깊은 형제 등 우리가 필시 선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가치들이 어느 한순간에 뒤바뀌어버릴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또한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선한 믿음 역시 우리의 인생에서 절대적 법칙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운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행이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얼마나 손쉽게 파괴할 수 있는지에서부터, 개인이 결코 저항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이 러시안룰렛처럼 랜덤으로 결정된다는 인생의 아이러니까지 우리는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벤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본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다. 벤에게 결여된 소위 '인간성'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은 언제부터 당연시되었단 말인가. 동류가 아닌 이류를 대하는 원초적 공포심이 이러한 인간성에 속하는, 응당 약한 자에게 가져야 한다는 측은지심을 능가하는가.

 예컨대 요양시설에서 벤을 빼내온 해리엇의 결정은 모성인가, 측은지심인가 혹은 해리엇이 정해놓은 이상적 인간상에서 자신을 제외시키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자기애에서 비롯되었나? 존을 포함하여 벤을 무리에 받아주었던 이들은 벤을 진짜 동료로 여겼을까? 그저 쪽쪽 빨대를 꽂은 돈주머니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그 안에서 벤은 진정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꼈을까? 인간이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독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벤의 사회화가 공포심을 이용한 폭압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인간은 본래 따뜻한 해보다는 차가운 바람의 힘과 폭력을 신뢰하진 않나? 그렇다면 소위 인간성이란 인간본성의 반대말인가? 벤과 해리엇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영영 불가능하다면 역사적, 정치적으로 반대편 진영에 서 있는 그들과 나의 상황 역시 다를게 무어람?

 많은 질문을 뽑아내는 작품이 훌륭하다곤 하지만 더 나아갔다간 인류애를 상실할 지경이므로 여기서 멈춰야겠다. 아니, 인류애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 역시 허상적 이데올로기에게 불과하지 않은... 자, 이제 그만 씻고 자자. 허상임에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생물뿐만이 아니라 무생물에도 한없는 애정을 쏟으면서 동시에 그 가치와 애정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일터이니, 그저 부디 오늘밤, 따뜻하고 부질없는 꿈이 나와 당신을 찾아들길 빌며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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