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타인의 화려함이 나의 초라함으로 변질되는가

두 철학자의 논쟁

왜 남이 화려할수록 나는 초라해보이는 것일까?



유명인이나 화제의 인물을 바라볼 때, 대중 개개인의 내면에서는 미묘한 가치관의 흔들림과 심리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왜 우리는 타인의 화려함을 보며 자신의 초라함을 확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와 분석심리학자 칼 융이 시공간을 넘어 깊이 있는 토론을 펼칩니다.

대화의 장: 현대인의 스마트폰 화면 앞, 무형의 공간



세네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숨 쉬는 현대인을 가리키며)

융 박사, 저들을 보게나. 자신의 삶은 여기, 이 순간에 있는데 정신은 온통 저 작은 사각 화면 속 타인의 삶에 가 있네. 화면 속 인물이 박수를 받을수록 저 친구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어. 타인의 행운을 보며 자신의 불행을 확신하는 이 기이한 고문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건가?


칼 융:

(부드러운 시선으로) 세네카, 저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있는 투사(Projection) 작용이지요. 사람들은 저 유명인에게서 자신이 갖지 못한, 혹은 억눌러왔던 빛나는 가능성을 봅니다. 내 안에도 영웅이 있고, 예술가가 있고, 부자가 될 씨앗이 있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꽃피우지 못하니 저 화면 속 인물에게 자신의 황금빛 그림자(Golden Shadow)를 덮어씌우는 겁니다.


세네카:

황금빛 그림자라. 흥미로운 표현이군. 보통 그림자란 빛을 가리면 생기는 어두운 것이지 않은가?


칼 융:

맞습니다. 우리는 보통 살인 충동이나 탐욕 같은 어두운 면만 그림자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림자에는 너무 눈부셔서 감히 내 것이라고 믿지 못한 나의 잠재력도 포함됩니다.

누군가를 보며 와, 저 사람 정말 대단하다. 빛이 난다라고 느끼며 넋을 놓고 바라본다면, 그 빛은 사실 당신 내면의 빛이 반사된 것일 수 있습니다.


세네카: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보석 상자를 열쇠가 없다고 방치해 둔 채, 남이 찬 보석을 보며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부러워만 하고 있다는 말이군. 참으로 안타까운 자기기만이야.


칼 융: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착각은 심리학적으로 세 가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합니다. 첫째는 생명 에너지인 리비도(Libido)의 유출입니다.


세네카:

에너지가 밖으로 샌다는 뜻인가?


칼 융:

그렇습니다. 내 밭에 뿌릴 물을 남의 밭에 쏟는 행위와 같습니다. 심리적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내면에는 창조적인 예술가나 유능한 사업가가 될 씨앗이 메마른 채 잠겨 있습니다. 이 씨앗을 싹틔우려면 당신의 관심과 에너지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속 화려한 인물에게 열광하고 감탄하는 그 몇 시간 동안, 당신의 리비도는 전부 밖으로, 그 화면 속 인물에게로 쏟아져 나가고 있습니다.


세네카: 통탄할 노릇이군. 나는 항상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 많은 것이라고 말해왔네. 남의 정원이 울창해지는 것을 구경하느라 정작 자신의 영혼이 시들어가는 줄도 모르다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손실이 아닌가.


칼 융:

맞습니다. 그렇게 에너지를 뺏긴 영혼은

두 번째 위험, 즉 대리 만족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가짜 포만감이 진짜 배고픔을 마취시키는 것이죠.


세네카:

가짜 포만감이라니?


칼 융:

뇌는 현실과 상상을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멋진 여행 유튜버를 보거나 성공한 사람의 일상을 볼 때, 뇌는 순간적으로 나도 저기에 참여했다는 착각을 일으키며 도파민을 분비합니다. 이것이 왜 나쁠까요? 건강한 결핍을 해소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그러니 지금 당장 글을 쓰자, 운동을 하자라고 움직이게 만들어야 할 성장 동력을 영상을 보는 행위라는 간식으로 때워버리는 겁니다.


세네카:

관객석에 앉아 검투사를 보며 환호한다고 해서 내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지. 그저 구경꾼으로서의 흥분을 자신의 승리로 착각하는 환각 상태와 다를 바 없군. 화면을 끄고 나면 밀려오는 그 허무함은, 결국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성의 차가운 경고였구만.


칼 융: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그 허무함은 마지막 세 번째 위험인 자기 비하의 강화로 이어집니다. 왕관을 남에게 씌우면 나는 신하가 되는 법이니까요.


세네카: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다는 말이로군.



vivid_wave_A_hand-drawn_line_art_illustration_bold_messy_stro_2b9fec4f-9c5a-4f6e-96f6-1d9506bdfe5e_0.png 어떻게 하면 당신을 닮을수 있습니까? ... (당신의 유명.. 당신의 스팟라이트)


칼 융:

그렇습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의 황금빛 그림자인 재능, 매력, 부를 투사해서 덮어씌우면, 그 사람은 당신의 눈에 초인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상대방을 높이는 만큼 상대적으로 당신 자신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특별한데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하고 찌질할까라며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리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금덩이를 꺼내서 남의 손에 쥐어주고는, 그 금덩이를 든 사람을 부러워하며 구걸하는 꼴입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타인의 소유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투사의 가장 큰 폐해입니다.


세네카:

황금빛 그림자... 듣기엔 그럴듯하네만, 결과적으로는 노예의 삶을 자처하는 꼴일세.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인정이라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에 맡겨버렸으니 말이야.

저 유명인이 입은 옷, 저 사람이 사는 집, 저 사람이 받는 환호. 그것들이 좋은 삶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정작 자신의 소박한 저녁 식탁이나 성실한 하루는 실패한 인생처럼 느껴지게 되네. 자신의 가치관이 타인의 과시에 의해 납치당한 것이지.


칼 융:

정확합니다. 그게 바로 집단적 최면의 위험성입니다. 대중은 스타라는 페르소나, 즉 가면을 숭배합니다. 문제는 개인이 그 거대한 페르소나와 자신의 초라한 현실 자아를 직접 비교할 때 발생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아의 위축이 일어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빛나는데 나는 무대 뒤의 먼지 같구나라고 느끼죠. 이렇게 되면 삶의 가치관이 존재(Being)에서 → 소유(Having)와 전시(Displaying)로 이동합니다.

나를 채우는 것보다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집에 부적을 붙여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것과 유사한 행위입니다.


세네카 :

부적? 부적이라니?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소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한다는 것인가?


칼융:

예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을 집단적 부적(Collective Amulet)의 구매라고 부르고 싶군요. 내면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입니다.

내면이 빈곤한 개인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강력한 집단이나 인물에게 소속되려 합니다. 이때 그들은 집단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자아 팽창을 경험하지요. 자네가 말한 부적은 스스로 빛날 수 없는 자들이 남의 빛을 빌려 쓰기 위해 지불하는 정신적 월세와 같습니다. 하지만 빌려온 권위는 결코 내면의 공허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세네카:

그렇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불안한 거야. 남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해 괴로워하고, 막상 가지게 되면 더 가진 자를 보며 또다시 괴로워하지. 왜냐하면 진정으로 자신의 자아에 대한 것이 아닌, 항상 빌린 것에 대한 것이니까.


나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네.


왜 너 자신으로 사는 것을 그토록 수치스러워하는가?


유명인의 삶은 그저 운명이 그에게 던져준 역할극일 뿐일세. 연극이 끝나면 배우가 가면을 벗듯, 그들도 똑같이 늙고 병드는 인간일 뿐이야. 껍데기에 현혹되어 알맹이인 자신의 이성을 버리는 건, 남의 집 잔치 구경하느라 자기 집 불난 줄 모르는 것과 같네.


칼 융:

하지만 세네카,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웅을 찾습니다. 다만 현대인들은 그 영웅을 내면에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찾다가 길을 잃은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누군가가 사무치게 부럽거나, 혹은 그 사람을 보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저 사람의 저 모습이 사실은 네가 살고 싶었던 모습이다. 그러니 부러워만 말고, 그 에너지를 회수해서 너의 삶을 가꾸는 데 써라.

즉, 환호는 저 사람에게 보낼 것이 아니라, 싹을 틔우려는 내 안의 잠재력에 보내야 합니다.


세네카:

동의하네...


결국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면의 요새를 쌓는 것만이 답이야.


유명인이 100억을 벌든 전 세계가 환호하든, 그것은 내 덕(Virtue)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해. 나의 가치는 좋아요 숫자나 통장 잔고가 아니라, 오늘 하루 내가 얼마나 떳떳하고 친절하며 이성적으로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그 단단한 가치관 말일세.



[에필로그: 흔들리는 당신을 위한 실천 가이드]

우리가 유명인을 보며 느끼는 박탈감은 행복의 기준을 나의 내면에서 타인의 외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준 상태인 것이죠. 우리는 내가 이루지 못한 꿈, 즉 황금빛 그림자를 유명인에게 투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빛날수록 나는 더 어둡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제 남의 것을 즐겨보는 행위를 멈추고, 그 에너지를 회수해야 할 때입니다. 칼 융의 조언에 따라 다음 단계들을 실천해 보세요.


질투와 동경을 해부하라


누군가가 너무 부럽거나 멋져 보입니까? 그 사람의 정확히 어떤 점이 부러운지 적어보세요.

(예: 그 사람의 자유로운 화술이 부럽다.)

선언하라


그 특징은 저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나의 황금빛 그림자임을 인정하세요.

(예: 아, 내 안에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욕구와 재능이 있구나. 내가 그것을 억누르고 있었기에 저 사람을 통해 보고 있구나.)

행동으로 물을 주라


이제 그 에너지를 화면을 보는 데 쓰지 말고, 서툴더라도 직접 하는 데 쓰세요. 남의 글을 읽고 감탄하는 대신 나의 엉성한 글 한 줄을 쓰세요. 남의 여행을 보고 부러워하는 대신 내 동네 산책이라도 나가세요.

남을 보는 것은 쉽고, 나를 만드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타인의 인생 관객석에서 일어나 당신 인생의 무대 위로 올라갈 때, 비로소 당신 안의 황금빛 그림자는 진짜 당신의 빛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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