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모름지기 기분이 굉장히 좋을 때와 기분이 굉장히 나쁠 때, 그 극단에 있을 때 어떤 결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결혼하던 무렵 평소보다 들떠 있었음이 분명했다.
평소에는 만져 보기도 쉽지 않은 돈들을 써대고, 여기저기 축하에 축복에 나를 향한 긍정적인 관심들에 들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손발이 다 오글거리다 못해 다신 펴지 못할 만큼 주먹을 꽉 지게 만들 일이 있었다.
나는 원래도 누군가에게 내 감정과 상대를 향한 마음을 글로 전달하기를 좋아했다.
결혼하기 며칠 전 그날도 나는 꾹꾹 눌러 나의 진심을 예쁜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예단이 들어가던 날.
나는 그 편지를 시어머님께 전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오래가지도 못할 들뜬 나의 끈기 없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막내딸 같은 며느리가 되겠다는 등의 말들이 적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소름이 끼친다.
지금 적으라면 절대 절대 표현하지 않을, 아니 못할 말들.
정말 새벽 두시, 아니 새벽 세시를 며칠째 반복해서 겪고 또 겪어서 명치 중심부터 그윽하고 센치한 마음이 우러러 나왔을 때 그 농도가 굉장히 진해져 있을 때나 겨우겨우 나올까 말까 한 말인데.
그런 말을 그땐 왜 그렇게 쉽게도 적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말들이 가져올 시부모님과 나 사이에 어떤 유대감 같은 거라도 생기기를 바랐었나 보다.
정말 후회스럽다.
지금 생각하면 일단 있을 수 없는 일 자체였던 거 같은데 의욕이 넘쳐서 생긴 치명적인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해 주시기를..
그때의 말 중에 딸 같은 며느리라는 구절이 참 마음속에 걸리는데
지금의 나로선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
있을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며느리도 사위도 각자 나름이겠지만, 과연..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시부모님과는 이십 대 초반부터 만나 온 남편 덕분에 15년이 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뵈어 온 사이다.
특히나 사귀기로 한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우리가 있었던 술집 근처에 두 분이 계시다며 나를 데려가서는 주말에 밥 먹으러 오라시는 어머님의 말을 고지 곧대로 알아듣고 나는 사귄 지 일주일 만에 시댁에 첫 방문을 했었다.
만나온 기간이 기간인지라 남편의 형, 지금의 시아주버님과 마주 칠일도 종종 있었다.
시아주버님과도 나이 차이가 일곱 살이나 났기 때문에 주말마다 찾아가며 아버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며 지내던 나를 막내 동생정도로 생각하며 대해 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나는 조금씩 그 집안 식구가 되어 갔다.
어찌 생각하면 그런 분위기 덕분에 자연스럽게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리라는 생각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식구들이.
그렇게 결혼을 하고 얼토당토않은 손발이 오글거리는 나의 마음을 전한 이후로 그런 나에게 얼마나 기대를 하셨을지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셨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 딸이 되기 위해 애쓰는 며느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었다.
여기서 되고 싶다는 말은 지금의 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해야 했던 것들을 일정 부분은 포기했다는 것.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해서 변경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우리 엄마의 딸이었다.
한동안 소정의 책임감으로라도 시댁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챙기고 식사자리를 만들고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하던 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는 점점 나의 생활에 집중하게 되고, 아무런 애를 쓰고 싶지 않은 날들이 늘어 갔다.
잠시 틈이 나거나, 여유가 생겼을 때 내가 찾거나, 나를 찾는 건 우리 엄마였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와 남편도 우리 엄마, 너네 엄마를 나누고 있었다.
남편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댁이 싫거나,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우리 엄마를 찾았을 뿐이었다.
처음 결혼했을 때 나와 같이 오글거리는 멘트로 서로를 기대하게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장인 장모에게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 나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니, 여유가 없다 보니, 각종 이런저런 이유들이 생길 때 먼저 찾게 되는 것은 그의 부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고 있다.
남편은 내가 우리 엄마를 찾는 횟수보다 더 많이 그의 부모의 안부를 묻고 있다.
그리 긴 통화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누구나 마찬가지로 내 부모에게 잘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는 있겠지만, 나는 지금의 상태가 좋다.
요즘 말로 각자 효도라고도 하던데 그 말은 내 마음을 너무 비약하고 있는 말 같아서 내게 갖다 붙이고 싶지는 않다.
마음은 충분하나, 서로에게 가장 편한 방법으로 양쪽의 부모 모두를 챙기는 방법이다.
왜 굳이 나 살기도 바쁜데 부모를 챙겨야 하냐는 질문에는 그다지 챙긴다고도 볼 수 없는 정도의 내 마음속 후회를 남기지 않는 최소한의 마지노선 정도일 뿐이고, 각자의 마음이 편하고 결국엔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이니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잘못하고 있다고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나와 남편은 서로의 가족을 한 팔로 끼어 묶어 놓는 정도로 우리는 이어져 있다.
우리는 결혼 후 첫해는 신혼생활을 두 번째 해부터는 아이를 갖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가장 허무하고 답답한 일 중에 하나였다.
아이는 생각대로 생기지 않았고, 그 후로 몇 년을 아이를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다.
나는 친정에도 시댁에도 아이가 안 생긴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굳이 용기가 필요한 일인 건가 싶긴 하지만, 아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빙빙 돌려댔으니 직구로 날려버릴 만한 용기가 없던 것은 맞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추석 명절을 앞두고 시부모님이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며 남편과 나를 조금 일찍 오라고 하셨다.
나는 아이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기 전부터 마음속에 눈물이 차기 시작했다.
시댁에 도착했을 땐 긴장되어 보이시는 두 분의 모습이 보였고 그 덕에 나는 더욱 긴장해서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거실에 마주 앉을 때도 평소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그때 시어머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다.
시험관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집에서부터 찰랑이던 눈물이 어느덧 광대까지 차올랐음을 느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원하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지만, 본인들이 걸려서 시험관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
어디선가 여자 몸이 엄청 힘들고 괴로울 것이라는 말을 들으신 것 같았다.
점점 내 눈물은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고 눈가까지 찰랑이다가 아버님이 본인들은 괜찮으니 억지로 시험관을 하지는 말라는 말을 하시자마자 찰랑이던 눈물이 결국 넘쳐흐르고 말았다.
한번 차오른 눈물은 멈출 수가 없었고, 내 반응에 두 분도 적잖이 당황하셨다.
남편도 그 순간 말은 안 했지만, 마음으론 울고 있었을 것이다.
침착한척하려 어색하게 웃는 모습들을 내게 들켜버렸으니까.
그 순간은 감동도, 민망함도, 안도도 어떤 마음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계셨구나 두 분도.
걱정하는 나를 더 걱정해 주시고 계셨구나 하는 고마움.
그거였던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내가 생각했던 나의 부모, 너의 부모가 잠시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각자 한 팔씩 자기 부모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던 가족에서 동그랗게 마주 보며 둘러싼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나는 나의 부모에게, 남편은 남편의 부모에게 각자 안부를 묻고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렇게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남편의 부모와 가족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