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권태기.

by 김로기

권태기.

생각해 보면 불편한 단어.

권태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 혹은 싫증 이라는데

그러기 위해선 시들해지는 상태까지 이르기 위한 시간과

그 시간들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고로 애를 썼기에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것 인데도

왜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큰 건지.

연애기간이 길었고

보통 3년 정도 주기로 권태기가 찾아온다고들 하는데

그 맘때 평소와 다를 게 없어서 우리 사이엔 권태기라는 게 없을 줄 알았다.

왜인지 나름 자부했었다.

우리는 큰 싸움도 잘하지 않으며, 권태기 같은 건 없는 누가 봐도 완벽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뒤로 일이 년쯤 지나 우리에게도 권태기가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만.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였겠지만

늘 나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그와

나의 동요에도 반응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서운했다.

지금 마음으로 생각하자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던 거겠지만.

그때는 무덤덤하게 동요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나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들이 쌓여가고 나는 매일 같이 울었다.

소리 내어 우냐, 숨죽여 우냐 차이였을 뿐.

매일 울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이러다 헤어지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때가 스물여섯이었다.

우리의 연애는 언제나 평온했기에

그때의 남편은 이러다 지나가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헤어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말만큼은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정말 정말 하고 싶지 않았기에

매번 연습한 말들을 삼켜야 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눈치 볼 일들이 많아서 웬만한 일엔 눈치가 빠삭한 편이지만

나는 내가 알아챔으로 인해 불편한 상황이 생길까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일도 많았는데

그 당시엔 나의 그런 빠른 눈치가 정말 싫었다.

그가 겉으로는 나의 말에, 나의 요청에 긍정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속으로 1%의 부정적인 마음이 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그때 정확하게 눈치챘다.

정말 필요치 않게.

상대의 애씀이 있었고, 마음속의 생각이야 누구든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거였지만

나는 그의 그 조금의 자유로움에 마저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모든 상황들에 동요가 없던 남편도 참 대단했다.

정말 무신경한 거였을 수도 있지만 뭐가 됐든

그때의 나는 그런 모든 게 좋아 보였을 리가 없다.

내가 느낀 감정과 그에 더불어 표현되는 나의 말과 행동이

그간 지켜오던 우리의 노력과 시간을 뭉개고, 짓밟고 있었다.

어느 날은 여느 주말과 같이 나를 데리고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뭘 할 거냐고 물었고, 그는 뭐가 하고 싶냐고 되물었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울컥했다.

도대체가 나랑은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

늘 무언가를 하자는 쪽은 내 쪽이었고 그에 응하는 쪽은 그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예민하게 그 말에 반응했다.

그 시기가 하루 이틀 이어지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도 예민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평소답지 않은 강한 말투에

조금씩 물이 새어나가던 물풍선이 갑자기 터져버린 것만 같았다.

물이 새는 것이 아니라 터져서 흘러버리고야 말았다.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모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려 들었다.

“차 세워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차 세워 달라고”

그때의 그는 나의 말을 무시한 채 그냥 앞만 보고 운전했다.

글쎄..

지금 생각하면 무시가 아니라 인내였고

그의 인내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인내로 나와, 우리의 관계를 지켜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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