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손을 베었다.

부엌에선 긴장을. (53번째 이일)

by 김로기

칼 앞에 서는 일도 벌써 수년이 되었지만

한 번씩 느껴지는 등골의 서늘함은 여전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사고는 찰나의 순간 일어난다.

그날 아침도 평소와 다름없이 주방에 서서

설거지 후 물기가 빠진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전날 장을 봐둔 야채를 손질해서 넣어 두려고 칼을 들었고

생각보다 단단한 고구마를 썰다가 결국 손을 베고 말았다.

칼은 손톱을 스쳐 손가락을 날카롭게 지나갔다.

소름이 끼쳤다.

참 여러 번 겪는 일이지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어릴 적 문구용 칼로 친구와 장난을 치다 사고가 난던 적이 있었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저릿하게 남아서 인지

날카로운 것들 앞에서는 늘 긴장하고 조심하는 편임에도

그날은 잠깐 방심했던 모양이다.

칼이 손가락을 스쳐 지난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피를 보고 싶지 않았고

손가락을 세게 쥐고 있을 뿐이었다.

치료를 위해서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어야 했고

결국 손가락의 갈라진 틈사이에서 새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피를 씻어낸 후 지혈이 좀 된 듯싶어 밴드를 붙이고

주방의 손질하던 재료들은 모두 그대로 둔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울에 살짝 비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고작 고구마 하나에.

한동안은 칼이 무서울게 분명했다.

엄마가 그 모습을 봤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성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엄마도

종종 칼에 손이 베인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자주 손이 베이는 것도 같다.

칼이나 깡통햄, 하물며 스테인리스 집게를 설거지하다가도 손이 베이곤 한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요리프로에 나오는 프로 요리사들도 종종 손이 베인다.

아무리 주방에서의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해도

손가락이 무사하리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매 순간 조심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사람인지라 종종 찾아드는 방심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도 고작 밴드 정도로 수습이 가능할 정도의 사고를 겪었다면

그 장소에 섰을 때만큼은

더 큰 사고를 대비해 긴장하는 습관을 들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음엔 고작 그 정도로 마무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더해가며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먹지 못할 장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