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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가 되는 길.

누구나 고아가 된다. (75번째 이일)

by 김로기

나기를 고아로 난 아이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고아가 된다.

사람은 일평생 고아가 되어 가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까지고 내가 그늘 아래 있을 것만 같던 시간들은

야속하게도 그것이 시원했구나 느낄 무렵이면 사라지고 없다.

나는 알고 있을까.

나의 그늘이 얼마나 남았을지.

내 이마에 얼마나 손을 얹어 나를 가려 줄 수 있을지.

그냥 모른 척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막막하니까.

고아가 되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니까.

언젠가는 분명히 다가올 일을 모른척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내 나이였을 무렵

어쩌면 나보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을 일찍이도 겪었다.

내가 바라본 그때의 엄마와 아빠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물론 많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때의 그들보다 더 자란 지금의 나는

고아가 되었을 때 슬프지만 그들만큼 차분할 수 있을까.

아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겠지만

나의 엄마와 아빠가 살아낸 것처럼

나도 살아지기는 할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는 것일 테니까.

매일매일을 살다 보면 어느새 그만큼 살아온 것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정신이 들고 그걸 발견할 무렵이 되면

그때부터는 차츰차츰 일상을 찾아갈 수도 있다.

살다가 한 번씩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득문득 기억이 나면서

소리 없이 울어대긴 하겠지만

어찌 됐든 살아지긴 할 것이다.

부모는 자신들이 겪은 고아가 되어가는 시간들을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저앉아 울기만 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고아가 되기 전

자신의 그늘을 대신해 줄 다른 그늘을 찾는다.

그래서 자식은

해가 지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던 부모의 그늘이 넘어가면

꼭 타 죽을 것처럼 뜨겁다가도

생각지도 못한 다른 그늘이 내 머리를 가려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부모의 그늘은 함부로 사라지지도 못한다.

내 새끼 델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크고 긴 그늘이 다가 올 위치에 새끼들을 데려다 놓는다.

그제야 다른 그늘과 바통을 터치하며 조금씩 사라질 준비를 한다.

그렇게 자식은 부모가 미리 만들어둔 그늘 아래서

부모보다는 조금 수월하게 고아가 되어간다.

고아가 되는 길은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다들 살아간다.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기에.

우리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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