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 점자 위에 서 있던 순간. (87번째 삼일)
생각 없이 휴대폰을 보며 길을 걷다가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때 '위험하오니 뒤로 물러서 주십시오.' 하는 알림음이 울렸다.
도로에 가까이 다가서면 저절로 울리는 이 경고는
몇 해 전부터 대부분의 횡단보도에 설치되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은 이어폰을 낀 탓에 그 알림을 듣지 못했는지
연거푸 위험하다는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시끄러울 정도로 반복되는 알림 소리에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본인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나도 못마땅하게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언제 이 시끄러운 알림이 그치고
신호가 바뀌려나 싶어서
바닥에 깔린 빨간불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 바로 옆에 노랗고 울퉁불퉁한 정사각의 블록들이 함께 보였다.
그 노란선을 따라가다 보니
그 위에 내가 있었다.
하고 많은 자리 중에 바로 그 위에
내가 올라서 있었다.
어쩌면 시끄러운 알림을 울리게 하던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 또한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서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고
다행히도 시각장애인은 없었다.
때로는 가끔 어딘가에 집중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노란선을 따라 걷고 있을 때도 많았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를 위한 알림을 무시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길은 넓고 점자는 많고
그 점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매 순간 넘쳐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점자를 제외한 내가 갈 길 또한 넓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만에 하나 그 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도록
그 길을 따라 걸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실 큰 노력조차 필요하지 않은 일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 위에 서도록
조금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