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알지 못할, 내가 오래도록 그리던 꿈같은 순간. (84번째 이일)
나는 원래 걷는 것을 참 좋아한다.
걷는 길 끝에 어떤 이유가 달리지 않아도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내게 요즘 같이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저녁.
집에만 있는 것이 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얼마 전부터 남편은
종종 밤산책을 제안하곤 한다.
매우 당황스럽게도.
결혼 후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고
치사할 정도로 애원을 해도
남편은 나의 산책길에 동행하길 꺼려했다.
며칠을 조르고 이것저것 밑밥을 깔아 둬야
겨우 십분, 이십 분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칼 같은 거절 의사를 밝히고 나면
나는 결국 토라진 마음으로 혼자 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그럴 때면 강아지와 함께 나온 부부들이나
저녁 먹은 배를 어루만지며 도란도란 걷는 가족들이
그렇게도 부러웠었다.
그저 힘들이지 않고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이토록 시원한 날씨에 함께 걷는 것이 뭐가 그리도 어려워
나를 이렇게 서럽게 만드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그것도 먼저 밤산책을 제안하다니.
처음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걱정이 됐다.
그렇게 이틀 삼일이 지나고
남편의 밤산책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진짜 내가 원하던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은 알지 못할 내가 오래도록 그리던 꿈 같은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남편이
왜 내게 산책을 제안했는지 궁금해졌다.
며칠을 생각해 보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이유를 알아냈다.
그간 남편은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이제야 조금 스스로에게 여유가 생기고
그 마음에 내가 원하던 것들을 채워줄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내가 미처 알 수 없는 무엇이 남편을 짓누르는 동안에
몇 걸음 걷는 게 뭐가 그리 힘든 일이냐고 재촉하던 나는
그의 마음을 더 옥죄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은 조금 가벼워진 듯해 보여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내게 더 내어준 것 같아 고맙다.
오늘 밤에도 그와 함께 걸으며 느낄 바람이
참 따뜻하고 시원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