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행 열차를 탔는데 내려보니 밀양이었다.

뜻하지 않은 즐거움. (102번째 일일)

by 김로기

이십 대 초반 친구와 함께 경주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이른 아침 KTX를 타기 위해 우리는 광명역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무작정 설레는 법이다.

우리는 설렌 기분을 가라앉힐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역 안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고

혹시 몰라 약국에서 비상약도 구매했다.

누가 보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여행이라도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고작 1박의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크나큰 배낭을 메고

티켓에 적힌 열차 시간과 게이트를 확인했다.

잠시 후 주변이 어수선해지더니 이내 열차가 들어왔다.

우리는 침착하게 티켓에 적힌 자리를 찾아갔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는 열차의 출발과 함께 침착하게 가라앉혔던 마음을 다시 놓아버렸다.

미리 사둔 치즈스틱부터 과자까지 먹어가며 신나게 경주에서의 일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얼마 뒤 우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리 또래로 보이는 두 남자가 티켓과 우리를 번갈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친구와 나는 서로 얼굴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고

그 일행이 건네 보인 티켓에는 우리와 같은 좌석번호가 적혀있었다.

그제야 우리는 동대구역을 지나쳐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경주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동대구역에서 내려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에 정신이 팔려 환승역을 지나치고야 말았던 것이다.

다급히 짐을 챙겨 역무원을 찾아 나섰다.

역무원은 우리에게 다음 역에서 내려 반대편 열차를 탈 수 있게끔 티켓에 표기를 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역인 밀양역에 내렸다.

유난히도 날씨는 맑고 하늘은 푸르렀다.

밀양이라고 적힌 푯말을 보고서야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잠시 후 되돌아가는 열차에서도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즐거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순간이 전혀 지루하거나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목적지에 조금 늦게 도착한다는 것뿐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그날의 우리는 작은 실수를 했었다.

그래서 평생 가볼 일 없던 밀양역에도 들러봤고

그렇게 맑고 푸르던 하늘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인생에서 실수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것도 아닌.

그저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만나게 되는 일.

그 순간이 나의 밀양역처럼 운이 좋게도 좋은 기억만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너무 좌절하거나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려야 하는 역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이

지우지 못할 큰 잘못은 아닌 것처럼

그저 실수에 불과할 뿐이고

나를 경주역으로 데려다줄 기차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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