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건네던 말
임신을 하고 나면 몸 하나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한 시간씩, 무리가 되지 않도록 천천히 동네를 걸었다. 쌍둥이임에도 아기들은 또래보다 더 크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 22주 진료 날, 초음파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던 교수님이 조용히 말했다.
"수축이 좀 보이네요. 자궁경부 길이도 짧고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출산까지 병원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겁이 났다. 나는 일주일만 절대 안정을 취하겠다고 버텼지만, 결국 23주에 입원했다.
그날부터 나의 집은 대학병원 고위험산모실이 되었다.
하얀 벽, 일정한 온도, 환자용 침상과 그 주위를 둘러싼 커튼. 그 좁은 곳이 나와 둥이의 세상이었다.
당시는 코로나가 한창이어서 면회는 하루 한 사람, 단 1시간뿐이었다. 새벽 5시면 간호사가 커튼을 걷고 들어와 채혈을 했다. 뒤이어 인턴이 태동검사를 하고, 초음파실에서 자궁경부 길이를 확인했다.
월요일이면 폐 엑스레이가 추가됐다. 트랙토실, 라보파, 마그네슘—출산을 늦추기 위해 가능한 모든 약을 썼다. 하루 종일 링거 줄에 매인 채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게 일상이었다. 샤워는 링거 교체일에만, 그것도 10분 이내로만 허락됐다. 임부용 압박스타킹을 신고 벗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저녁 6시가 되면 남편이 들어왔다. 매일 깎아온 사과 한 개, 친정엄마가 직접 만들어 보내주신 검은콩물. 그게 내 하루의 작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맛있는 무언가’가 간절히 당겼다. 그럴 때 남편이 몰래 구워온 소고기나 병원 앞 제과점에서 사 온 팥빙수와 같은 사치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 순간만큼은 환자도, 고위험 산모도 아닌, 그저 맛있는걸 먹고 기분이 좋아진 내가 될 수 있었다.
입원 4주차쯤부터 몸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배는 더 불러오고, 손발은 퉁퉁 부었다. 자궁경부 길이는 계속 짧아졌고, 수축도 더 자주 느껴졌다.
입원 8주차, 임신중독증이 왔다.
혈압이 오르고, 소변에서 단백질이 나왔다. 누워서 평범하게 숨쉬기조차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매일 배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잘 있지? 조금만 더 버텨줘."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인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낮에는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봤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밤이면 배뭉침이 잦아져 잠을 설쳤다. 그럴 때면 부풀어 올라있던 배가 밀가루반죽처럼 찌그러지는게 눈에 보였다. 전자간증으로 간수치까지 높게 나왔다. 먹고 있던 약도 많았는데 간수치를 낮추는 약까지 추가되었고, 링거는 여전히 4개나 달고 있었다. 이제 30주를 갓 넘긴터라 좀 더 버텨야만 했다.
입원 9주차, 몸 상태는 더 나빠졌다.
수축은 더욱더 심해지고 자궁경부 길이는 점점 줄어들어 수축억제제도 최대 용량으로 올렸다. 매일 아침 초음파를 찍을 때마다 아기들이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랐다. 하루에 1kg씩 몸이 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밤, 참을 수 없는 심한 복통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