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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Mar 16. 2016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죽음에 대한 복수'

혁명이면서 혁명의 다음날이다. 개인의 혁명은 경험이다.

사람들 눈에는 그저 
야릇한 에로티시즘으로만 보여.
또 그것을 혐오스러운 것,
혐오스러운 소극으로 받아들이지.

내가 도달한 나이, 나이에 끌리는 것, 
나이 때문이야

굴복의 쾌락과 더불어 정복의 쾌락, 
숭배하는 삶, 권력

서로 꼬아지는 강박의 원천......

p46-47



The Dying Animal - Philip Roth


여자는 물결치는 하나의 긴 선으로 
그곳에 누워 기다리지,
죽음처럼 고요하게.



필립 로스는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 <굿바이, 콜롬버스> <포트노이의 불평> <에브리맨> <유령퇴장> <울분> <전락> <네메시스> 등의 작품이 있다. 그의 소설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철학적이고 웅대하고 감동적이고 기품 있다 평한다. 또 한편으론 맹렬하고 충격적이고 비극적이고  문제작이면서 금서로 낙인찍힌다. 무자비하고 직설적이고 절박하고 절제된 문장, 죽은 자들의 무덤까지 닿는 글이라 한다. 언젠가 한 번은 그의 글을 읽게 되겠지 생각했다.


<죽어가는 짐승>작품 속 주인공 노 교수의 시선과 화법 건조하면서 은밀하다. 그는 학생들에게 다가서지 않고 다가오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수업에서 쿠바인 3세 콘수엘라 카스티요를 만난다.  그 아이에게 베일을 씌우기 시작한다. 순수한 욕정, 야만적인 충동이 자라난 사이 자신의 희극을 즐기고 교활함을 찾는다. 에로스의 혼돈, 그 자극이 되는 근본적인 불안정성, 영원한 불균형, 지배하는 것과 굴복하는 것의 어떤 결과를 지켜본다.

70세 데이비드 케페시는 8년 전 자신의 사적인 즐거움을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야릇한 에로티시즘 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다만 자신의 핵심이 되어버린 콘수엘라에게 그 어떤 확신도 없었으며 평화를 빼앗기고 두려움에 시달렸다. 과거 자신의 형편없는 결혼, 그 우리 안에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처럼 쾌락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날 것의 나, 한때 나였던, 
지금은 내가 아닌...

규범의 옹호자들과 도덕성과 맞붙어 
그 권위를 쓸어버린 해방자...

공동체의 전통적 이해관계, 
공정성에 대립하는 자유의지, 
불복종, 쾌락의 민주화...

질서와 무질서의 충돌
이것은 혁명이면서 동시에 
혁명 다음날....



그가 아는 제이니 와이엇는 1960년대 미국 캠퍼스 여성의 성 윤리의 변화의 첫 세대이다 개척자다.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이라고 말한다. 반항적이고 순수를 혐오한다. 두려움 없이 저항한다. 이념도 없고 오로지 열린 쾌락만 놓여있다. 낡은 체제에 굴복하지 않았고 발전해 나갔지만 몇 번의 이혼과 정신병동을 오고갔다.

그리고 도움이 될만한 토머스 모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박해로 인하여 많은 청교도가 신대륙인 미국으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하였고 플리머스 식민지 메리마운트(오늘날 매사추세츠 주 퀸시)에 남자는 술을 마시고 인디언에게 무기를 팔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문란하고 이교도의 온상지가 된 곳이다. 모턴은 뜻?대로 그곳을 관장했다. 청교도들은 그를 체포하고  결국 그는 망명한다. 

지미 헨드릭스(60년대 기타리스트)가 제이니의 '그것'이었고 셰익스피어가 모턴의 '로큰롤'이 되었다. 지배계급은 분리주의자, 방탕한 삶, 무질서, 무신론, 불신앙을 싫어한다.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정신은 모턴에서 제이니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왜 그들을 무질서의 신학자, 자유의 창시자로 보지 않는가? 



자유를 어떻게 체제로 바꿀 것인가?



이 혁명의 논리는 결론이 무엇일까?  60년대는 혁명의 수혜자들이고 경험할 여유가 있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것을 차지했다. 현대 사람들은 자신이 시작하는 일의 힘겹고 비극적인 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금욕, 단념, 순결, 결혼을 한다. 결코 자신이 '버린 것'을 잊지 않아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마흔둘의 나이에 아들은 간통자가 되었다. 아들이 '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물한 살이었던 아들 케니는 여자친구를 임신 시킨다. 자신은 아들에게 낙태비를 건네준다. 결과를 감당할 것도 자신의 몫임을 말하여 준다. 아들은 여자아이의 훌륭한 집안 이야기를 하곤 두 달 뒤 결혼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실망시킨 것이 아들의 족쇄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아들은 어머니, 아내, 자식, 애인 이 모두에게서 떠나지 못한다. 

사랑은 희극의 원천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미치거나 어리석거나 비참할지 몰라도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데이비드 케페시는 자유를 향했지만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렸다. 질투, 애착, 갈망, 소유, 사랑이 모두 왜곡된다. 욕구와 혼란이 멈추지 않는다. 그는 고독의 쾌락에 취해 피아노를 연주한다....



내 심장을 살라다오,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짐승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
모두 그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 W.B.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 가는 배에 올라>에 나오는 구절 -




<마무리>

필립 로스는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악보를 보게 한다. 글이 매혹적이고 본능적이다. 나이가 들어도 잠잠해지지 않는 욕망을 그린다. 그 갈망 애처롭기까지 하다. 죽어가는 것, 보이지 않게 죽어가는 것, 그들의 시간이라는 낙인,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피할 도리 없는 생명의 위기에 처하는 나날 속에서 되묻는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체제는 어디로 갔나? 제이니, 모턴, 카스트로(쿠바 혁명가)가 했던 혁명의 다음날이다. 모험의 종말이다. 세상은 이미 통제된 무질서다. 텔레비전의 평범화가 비극을 누르는 승리, 그 재순환, 폭탄 하나 터지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쾅 하고 쿵 하고 폭발한다. 진정제를 맞는 우리 시대에 의해 평범하게 바뀌어 버리고 부유한 세계가 암흑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야만 닷컴의 도착을 알리는 인간 행복의 밤이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야 할 밤이다. p173-174


콘수엘라는 혼돈과 죽음의 상징이다.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았던 태초의 것이다. 육체의 운명을 가볍게 여긴다. 욕망이 없는 태연함 그 자체다. 느닷없고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개인의 혁명은 경험이다. 모든 경험 하나하나를 마지막으로 여기며 경험하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속에서 화자는 일관되게 콘수엘라를 '아이'라고 부른다.... 육신에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고 그런 슬픔, 끔찍한 갈망이 드리워진다. 드디어 자신과 일체가 된다.... 우리가 살 확률은 60세까지고 죽을 확률은 나머지 생이다.  아이가 온 것은 여덟시쯤이었다...



아이는 새벽 한시 반에, 시카고에 새해가 찾아온 뒤에 떠났어.



<떠오르는 문장>

<옛날에 대하여_파스칼 키냐르> 중에서..
자궁 속의 세계 이전의 다른 절대 세계, 태아로서 어린애가 체험했던 세계보다 앞선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환각이 아닌 상상의 세계, 원초적 이성애적 장면의 세계가 있다. 즉 옛날이다. 우리는 육신에서 태어난 육신에서 태어난 육신에서 태어난...... 육신에서 태어났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기원인 까마득한 심연.... 충동, 박동, 이 두 가지가 멈추면 삶도 멈추게 된다. 노인-어린애의 왕국. 마지막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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