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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May 06. 2016

네가 체험한 것을 네가 영원히 알지 못하도록...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중 5부 잃어버린 현재를 찾아서...


구어에 대한 연구의 존재론적 의미는
현실의 미스터리를 꿰뚫고자 하는 욕망이다.

-밀란 쿤데라-


우리는 꼬박꼬박 신문을 읽고 모든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기록들을 다시 읽다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단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도 떠올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더욱 고약한 것은 상상력이 우리 기억을 도와 그 잊힌 것을 재구성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라는 것, 검토할 현상으로서, 구조로서의 현재의 구체 내용은 우리에게 미지의 혹성과 같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우리 기억에 붙잡아 둘 줄도, 상상력으로 그것을 재구성할 줄도 모르는 셈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5부 잃어버린 현재를 찾아서 p191



밀란 쿤데라는 키치적-통속적이고 천박한 행위 뜻함-해석을 집단 무의식, 형이상학적인 프롬프터의 명령, 항구적인 사회적 요구라 말한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 현실 자체를 겨냥하며 그것은 플로베르, 야나체크, 조이스, 헤밍웨이 등이 한 일과 반대되는 일이고 그것은 현재 순간 위로, 실재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통념의 베일을 씌우는 것이라 한다. 그 결과 우리가 체험한 것을 우리가 영원히 알지 못하도록 한다.






기억의 끄트머리를 꼭 붙잡고 있는 듯하다. 어제가 그나마 뚜렷하고 전날, 전전날, 주말에 있었던 일까지는 읊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저번 주 월, 화, 수, 목에 있었던 일을 나열하려고 들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듯하다. 기억이란 경로는 어떤 날의 한 이미지, 이미지로 저장된 듯하다. 전체가 한 영상으로 풀가동되지 않는다. 띄엄띄엄 이어지다 끊긴다.


처참하게 사라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숨 막힌다. 빠르게 잊고 망각하여야만 살아난다. 그동안 많은 작가들이 반복해서 중얼거린 말들이다. 책 읽는 동안 그 책 읽는 시간에 내 생각이 새겨진다. 새겨진 이미지를 다시 글로 남기는 과정은 내게 잊힌 시간을 붙잡는 과정이다.


이 반복조차 없이 어떤 기록이라는 것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돌이켜 볼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곧 닥칠 쓰나미 앞에서 무력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래된 것들 앞에서 오래된 것들만 존재해 왔다. 지나간 사람들은 그 오래된 것들 앞에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 오래된 것 앞에 사진을 찍은 순간의 찰나가 아련하다.


오래된 것들은 순간의 찰나를 무엇이라 생각할까. 또 몰려오는 순간의 찰나를 무심하게 지켜볼듯하다. 오래된 것들은 오래된 시간 속에서 오래될 그 무언가로 남겨져 있다. 남겨지지 않는 육체는 살아있듯이 오래 남겨진다. 자신이 자신인 줄 모른 채 시간을 밟는다. 시간을 밟고 밟아서 나아간다. 시간을 밟고 있는 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이동의 순간을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를 모른 채 내가 한 일을 모른 채 시간을 밟고 밟고 나아간다.


의미라고 생각하는 의미가 더 이상 의미가 아니라면, 의미 없는 실존에 저항감이 생긴다. 실존의 미스터리를 풀지 않고는 이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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