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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23. 2016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는 늘 변하게 마련이다.

밀란 쿤데라 '스트라빈스키에게 바치는 즉흥곡'

나의 옛 스승을 사랑했듯이 사랑했을 뿐이다.
18세기의 멜로디에 20세기 불협화음을 덧붙이면
옛 스승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지 않을까?

-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

소설 예술 전반기를 구현한다. 행복감을 주는 구성의 자유, 자유분방한 이야기들과 철학적 성찰들의 부단한 이웃관계, 철학적 성찰들의 충격적이고 희화적이고 반어적인, 비진지성의 특성을 구현하고 변주하여 경의를 표한다. 이야기들은 가져왔지만 대화 속 성찰들은 지금의 것이다. 지금 세기의 등장인물들은 낙관적이지 않다. 더 이상 18세기 빛의 시대가 아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대한 어둠을 향해 걸어간다.


털어놓게 될 이야기... 소설가와 작곡가와 예술가들은 옛 스승에게 말을 걸고, 얘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옛 작품의 유희적 개작이 세기를 뛰어넘어 소통한다. 거기엔 과장들, 터무니없고 사실임 직하지 않은 것들을 마음껏 얘기할 수 있는 자유, 유희적인 꾸밈의 자유, 필요한 모든 자유가 있다.





음악사와 소설사



음악사 18세기 전체가 휴식기, 소설사는 18세기와 19세기 사이 휴식기다. 음악과 소설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후반부 미학을 통해 교육받았다. 전반부 미학과 후반부 미학 사이의 구덩이는 많은 오해의 원인이 된다.


세르반테스(1547~1616)가 그리는 세계는 꾸며 내고 과장하는 이야기꾼, 자신의 환상과 도를 넘은 상상에 실려 가는 이야기꾼, 자신의 환상과 도를 넘은 상상에 실려 가는 이야기꾼의 마법들에 의해 창조된 세계다. 비非진지성의 정신에서 생기를 부여받은 작품이다.


바흐(1685~1750)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멜로디이자 동시에 반주이기도 한 단 하나의 핵에서 출발하여 전개된다. 우리가 이 음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그 원칙들이 새로운 게 아니라 최소한 오백 년은 되었다한 번 망각의 사막을 거친 후로는 본래 얼굴이 언제나 반쯤 베일에 가린 것 같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회는 거의 전적으로 동시대 음악 하고만 함께 살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현재와 과거의 관계가 역전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완전히 연주회장을 떠나 버린 당대 음악보다는 고전 음악을 훨씬 많이 듣는다.








스트라빈스킨의 음악은 '음악에 의한 음악'이다. 카프카의 문학은 '문학에 의한 문학'이다.



음악은 어떤 감정, 어떤 태도, 어떤 심리 상태 등,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 무력하다

무감無感의 세계, 인간의 삶을 벗어난 세계다
그것은 영원이다. 태양이 함께하는 바닷길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통해 유럽 음악은
자신의 천 년 과거를 추억했다.

꿈 없는 영원한 잠을 향해 떠나기 전에 꾼
마지막 꿈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밀란 쿤데라는 음악적인 음과 소음의 관계 문제는 음악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문제며 음악의 역사 전체가 전적으로 현전하고, 접근 가능하고, 이용 가능하며, 의미를 캐는 갖가지 질문들에 열린 사상(초유의 순간)... 그런 거대한 대차대조의 순간을 말해 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같다고 말한다.


스트라빈스킨는 음악의 존재 이유가 주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음악을 객관화하려 한다. 음악적 표현 행위에 개인성을 거부한다. 인간 윤리의 미적 표현을 중단하길 바란다. 그의 이런 대목에서 지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장의 투사들은 스트라빈스키를 공격하거나, 그의 음악을 구제하기 위해 작곡가의 '그릇된' 개념들과 음악을 분리하려고 애쓴다.


쿤데라에게 객관적이나 실존하지 않는 음향 세계의 그 이미지들은 공격적이고 성가신 인간의 주관성에서 해방된 존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등장 이전에 세계나 인간의 자취가 사라진 세계의 감미로울 만큼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동화이며,
행복이 아니라 감정의 토로다.

사람들은 음악이 연인들을 자기들만의 내밀한 공간에 가두는
그런 작은 춤판 속에 있지 않다.
거대한 홀, 큰 스타디움 안에서 서로 비좁게 엉겨 붙어있다.

그대로의 자신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우리 시대의 자기기만들 가운데 하나다.






스트라빈스키, 클레, 뒤피, 뒤비페, 아폴리네르 감상


https://brunch.co.kr/@roh222/203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으로 밀란 쿤데라는 무엇을 이해시키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현재의 엑스터시에 빠져 과거와 미래를 지우는 우를 범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엑스터시의 초상을 그린 작품을 만들어낸다. 음악에 의한 음악을 만들 뿐 자신은 그저 태양이 함께 가는 바닷길이 된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가 이 야만의 초상의 아폴론적 아름다움이 공포를 은폐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엑스터시의 맨 밑바닥에 다만 리듬의 둔탁함, 타악기의 매서운 가격, 극도의 무감각, 죽음이 있을 뿐임을 엿본다 한다.


스트라빈스킨는 어릴 때 피아노 앞에서 무아지경이 되어 건반을 두드리다 아버지에게 업혀 식탁 위에 앉혀진다. 그의 아버지가 두려워했던 것... 아마도 지금 우리가 취해버린 것.... 그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음이 모든 것을 지운다. 우리 알아야 할 리듬, 움직임, 감각, 생을 없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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