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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May 19. 2016

소크라테스, 붓다를 만나다

THE BUDDHA MEETS SOCRATES

해리슨 J. 펨버턴 노 철학자는 인도 칼림퐁 칸첸중가(해발 8,598m)에서 17대 카르마파와 젊은 티베트 학승들에게 서양철학을 5주간 가르쳤다. 서양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정리한 그의 일지이다. 펨버턴 교수는 영적인 추구를 위해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철학과 교육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서로의 방해꾼을 전면에 내세워 질문하고 답한다.

카르마파, 업(Karma, 카르마)
티베트에서는 9세기 중반에 토번(吐蕃) 왕국이 붕괴한 후 오랫동안 통일 정권이 없었으며 11세기 이후에는 지방의 영주가 일족을 자신의 절의 관장(管長)에 두고 종교적 권위에 의해 통치하는 제도가 생겼다. 이것에 대해 특정의 지지기반이 없던 카르마파는 관장이 죽으면 그 환생이 되는 유아를 데려다 다음의 관장으로 육성하는 '전생라마’ 제도를 고안해 내었다. 이것에 의해 카르마 파는 지연이나 혈연을 초월하여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1. 어떤 관점에서 동서양의 사고 형태를 비교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주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두 스승인 붓다와 소크라테스 교육학은 무지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 특정 기술을 이용하면서 높고 깊은 통찰과 이해를 이끈다. 이들의 교수법은 동서양의 차이점을 정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주제
시간의 성질에 관한 것으로 서구의 직선적인 시간, 불교도들의 순환적인 시간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붓다를 만나다 (스님들과 함께한 첫 번째 철학 강의), 해리슨 J. 펨버턴





2.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전면으로 불러내려는 시도가 곧 교육

가르치는 것은 산란함과 모호함에서
우리의 진정한 정신의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지식이란 기억해내는 것이지 정보를 많이 모은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교수법은
 단순한 의견에서 이성에 의해 지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선 이데아의 빛을 본 철학자는 변증법의 자유로운 활동을 멈추고, 동굴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 그 안의 다른 사람들도 빛 속으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붓다
우리가 일상에서 희미하게 만들어버린진정한 정신의 영원한 불빛 속으로 돌아가는 법을 보여주려 한다.
보살bodhisattva은 열반에 들어야 가질 수 있는 온전한 행복 바로 앞에서 멈추고, 자비로운 스승으로서 이 세상에 남는 것 또는 깨달음과 열반에 도달해서도 이 세상에 무엇으로든 돌아올 수 있고 붓다는 확실히 깨달은 자의 가장 소중한 표본이다.

붓다와 소크라테스 / 동서양 철학 교육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 의무를 믿는 것이
우리를 더 낫게 하고 더 용감하게 하고 덜 무력하게 할 것이다.

붓다가 말했다.
나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금을 녹이고 자르고 다듬는 금세공자처럼
철저하게 조사한 후 받아들인다.




3. 덕을 가르칠 수 있나? 
진정한 확실성(서양) vs 깨달음의 궁극(동양)

결론, 진정한 정신mind과 그 덕은 가르칠 수 없다. 
그것들은 늘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상기'해야 한다.


동서양의 호소는 근본적인 본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주목한다.
지식은 우리의 근본 본성을 상기하는 것, 재인식하는 것이다. 근본 본성은 이성이고 지성이다. 

3-1. 동서양 공통점
붓다와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우리의 진정한 본성, 늘 그곳에 있어왔던 깊은 수준의 우리 그 자체를 호소한다. 
둘은 지식의 조각들을 추가하기보다, 진정한 우리 자신을 엄폐하고 방해하는 것들을 떨쳐버리려 한다. 


3-2. 차이점
불교 :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 최고의  조건은 해탈이다. 불교도가 봤을 땐 덕의 조건이란 불성 혹은 무아(selfless)이다.
그리스적 개념 : 덕이란 잘 기능하기 위한 조건이다.


적절히 헌신적이고 자기 훈련이 잘 된 사람이라도 
오직 죽음에 이르러서야 순수 지성에 도달하며, 
그 전에 순수 지성에 도달한다면 오직 죽음만 연습할 수 있다.

내내 그렇게 열렬히 연습하던 것이 왔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만큼 불합리한 것도 없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 -


3-2-1. 불교철학(인도,티베트 중심) / 셰랍과 예쉐, 이제론

-. 붓다의 말은 최종적이다. 
최종 호소 대상은 깨달은 자고 그중에서도 붓다이다. 
깨달은 자의 말을 안내로 삼고 깨달음의 길을 걷을 뿐이다.
논쟁은 무의미하다.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여라' 즉, 깨달은 자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권력, 우리의 진정한 자아로 향하는 길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경험이 풍부한 스승이 권위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내면의 궁극적 진리로 향하는 길에서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이 부처님이라도 방해가 될 수 있다. -펨버턴 교수의 말-

-. 셰랍Sherab 개념적인 지식
셰랍이 좋은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영리할 수 있으나 종종 피상적이다. 
셰랍이 있어야 예쉐로 나아갈 수 있다.
셰랍이 좋은 사람을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무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은 사람, 일종의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비유한다.
셰랍이 좋은 사람은 하나의 관점에 관한 것이라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관점은 곧 모두 제약이기도 하다.
단점은 그 제약 안에서 수정이 있을 수 있지만, 관점 없는 '비전'. 궁극적 진리를 따라 가지 못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더 큰 그림이 아니라 단지 대상들을 좀 더 큰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 예쉐Yeshe 비개념적인 정신의 지혜, 궁극적 지혜, 최종적인 해탈상태이다.
예쉐는 관점 없고 대상 없는 깨달음의 지혜다.
주장이나 논쟁은 공한 것이다.
비개념적이고 사고thought 없고 의심 없는 궁극finality을 얻을 방법은 자기파괴적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거해버리는 맹렬한 변증법과 끈질긴 훈련과 오랜 명상뿐이다.

-. 이제twofold truth론 : 세상 만물의 이해
1. 상대적 : 역사는 상대적인 진리다. 인도 문화는 역사적 사건들이 풍성함에도 무시해왔다
2. 관례적 진리
3. 불성의 궁극적 진리 : '분명한 사실'은 환상으로서의 자신의 상태를 전달하지 않고 사실 숨긴다. 그런 '사실'에 집중할수록 우리는 궁극적 진리에서 더 멀어진다.

-. 다르마dharma, 법法 : 활발한 마음의 양상이다. 순야타shunyata로 궁극적이고 비개념적인 개방Openness, 깨달음을 부르는 길, 올바른 삶과 긴 명상 뜻함. 정화의 끝에서 진정한 본성을 보는 것이다. 진정한 본성엔 양상pattern이 없다. 
(모든 순간이 끝이다. 모든 순간이 시작이기도 하고 끝없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파도는 순간적이지만 다른 파도가 일어날 길을 열어주며 끝없이 이어진다. .)

-. 윤회 : 반복되는 것은 마음의 양상pattern이다.

-. 쇠퇴(퇴화)의 시대 / 불화와 갈등과 파괴의 시대 : (흰두교, 칼라 여신의 시대) 우리는 결국 1미터도 안되는 키로 줄어들고 10년이상 살지 못하게 된다. 쇠퇴가 불가피하며 윤회를 받아들이듯 그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속세의 복잡함에서 깨달음의 자유로 옮겨갈 수 있다.



3-2-2. 그리스적 이론 /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 태양의 비유(선의 이데아) : 지적인 명료함,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이데아, 최후의 명료함 이데아로 나아가는 것

-. 지식의 네 단계를 보여주는 선분의 비유 
...지식의 4단계 중 3번째 연역법 개념 : 궁극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에 맞는 많은 이론이 스스로 정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4단계 중 4번째 이행move, 변증법적 개념 : 한 이론의 기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변증법은 물리학 예로 300년을 군림한 이론 뉴턴 절대적인 시간과 그 가정을 거부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적인 시공간 개념을 들 수 있다.

-. 동굴의 비유를 말하게 한 구절들

-. 우주론, 모든 생성의 용기receptacle 수용체라 함.
... 모든것들의 장소 혹은 공간은 보이는 반면 이 용기는 보이지 않는다.
... 플라톤 "이것을 보이지 않고 성격이 없으며 모두 수용하며 지성의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참여하며 이해하기 매우 힘든 자연이라고 불러도 속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3-2-3. 현대철학 / 데카르트, 니체, 칸트, 흄

소크라테스의 반어에는 더 깊은 반어가 있다.
우리는 오직 공포, 고통, 죽음에 직면하기 위해 이 생에 던져졌다.
어두운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우리는 
1. 디오니소스적으로 호색가가 되어 자아를 상실하거나, 
2. 아폴로적으로 예술, 환상, 꿈속에 살거나, 
3. 과학이 약속하는 새로운 명확성 속으로 도망간다.

물질matter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명확한 개념으로 이해한다.
물질의 본질은 공간을 취하는 것, 속성은 연장extension이다.
물질의 본질적인 속성이 연장이듯, 마음의 본질적인 속성은 생각이다. 


칸트에 따르면 주체는 모든 객체 경험에 형식적 통일성이라는 조건을 제공하고,
바로 그 형식적 통일성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과학적 판단과 사실에 입각한
보편적이고 타당한 판단이 가능하다.

그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는 길은 없다.
영혼 개체의 증명만큼이나 관계도 그 직접적인 증명이 어렵다.

과학적 방법의 논리를 어느 정도 강조하고, 이를 입증하는 데 끝이 없다 것과 
과학적 방법이 진행형이자 진보적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현대 세상에서 
어떻게 연구 조사 개념이 중요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3-2-4. 시간 감각 / 헤겔, 마르크스

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자들, 기독교 신학자 오리게네스도 순환적인 시간 개념을 생각했다.
니체조차  영원한 회귀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주류 기독교의 관점이 직선적인 시간, 창조에서 시작~최후의 심판으로 끝내는 쪽으로 바뀌었다.

시간은 직선적인가 순환적인가? 시간은 어느쪽인가?
과학이 자연 세계의 방대함 속에 합리적인 양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 역사의 방대한 풍경 속으로부터 합리적인 양식을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양식 직선적이고 진보적이다.
역사는 정립과 그 저립이 야기하는 반정립과 뒤이은 종합의 행진이며 
최종적으로 완벽한게 정리된 종합 상태가 나올 때까지 역사는 계속된다.  
진보는 분명히 있고 진보는 곧 직선적 시간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무의미한 진보, 그 순화적인 반복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존재와 생성, 지성과 감성, 실재와 현상, 본질과 현존, 합리론과 경험론, 선천성과 후천성, 이론과 실천은 서양 철학의 상당 부분을 형성해온 구분들이다.



3-3. 유사점, 사고의 흐름

라톤의 가정(assumption :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말하는, 직관적으로 인지되는 공리)에서 이데아Idea로의 변화 
불교적 사고 속 셰랍에서 예쉐로의 변화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의 난제는 태양을 직시할 때 오히려 눈이 어두워진다면 선의 이데아를 직할 때도 눈이 부셔 볼 수 없게 된다. 지성의 한계를 보여주고 나아가 그 한계의 넘어섬도 보여준다. 존재existence는 수용적인 텅빔empriness을 본다. 비규정성을 동양의 공empeiness 사상과 유사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정신이 우리의 세상을 건설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숙고할 때 감지하는 경험상의 에고 또한, 자료들을 하나의 것으로 종합한 일종의 건축물이다.
연구 활동 중인 사람의 사고 속에는 어느 한 쪽이 우세할 수 없다. 

스님들의 교육과정에 수학을 더 많이 포함시키고, 서양의 교육과정에 세심한 경험주의를 더 포함시킨다면?
셰랍의 한계가 있고 예쉐가 그 한계를 넘는 것처럼?
최후의 명료한 지성과 예쉐가 마침내 한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인가?
서양의 경험론이 그 한계를 넘어 동양의 해탈 사상과 만나게 될까?



3-3-1. 유사함이 차이점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사고 양식이 끌고 가는 최후의 통찰 속에서 그 유사점을 잃게 된다. 
예쉐는 의심을 지울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지적인 확실성을 줄 수는 없다.

과학도 우리들의 에고도 환상 속에 그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과학이 이 무상한 세상에 놀랍도록 밝은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 지식은 셰랍에 해당할 것 같다.

니체는 과학을 악화의 징후로 보고 어두운 진실을 무마하려는 억지스러운 쾌활함으로 볼 것이며,
불교도는 과학을 궁극적 진리에 반하게 하는 매력적인 방해꾼으로 볼 것이다.
존재는 시간 너머의 세상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순수 지성의 확실성에 의존하며, 
붓다는 텅비고 순수한 마음의 비개념적이고 궁극적인 지례에 의존한다.

과학의 방법론의 논리에서는 형식면, 목적면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분명한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연구를 강조할 때 진정한 진보의 개념이 최소한 과학에서는 명확해 진다.
궁극의 공식, 최후의 설명을 향해 오르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생각은 좀 더 겸손한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자연 과학과 역사에 대한 생각과 매혹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서양 철학(이성)
우리가 재인식할 수 있는 것은 지성이고, 개인적 관점을 넘어 객관적으로 이해할 때 그 지성에 도달할 수 있다.

동양 철학(불성)
비개인적이고 비개념적인 개방상태인 불성으로 녹아들어간다.

세상에 몰두한다는 것은
그만큼 산만해졌다는 것이고,
그만큼 속박당했다는 것이고,
그만큼 벗어날 필요가 있는 뜻이고,
그만큼 예쉐에서 멀어졌다는 뜻이다.




4. 최종, 영원한 진리


어떻게 우리가 자아를 구성하는 엄청난 경험의 무더기를 넘어 비개인적인 불성의 고요함으로 나아갈 수 있나?
붓다는 개인적 영혼의 개념이 우리를 윤회에 얽매이게 하는 속박을 거부했다.
소크라테스 삶이 결국 환상임을 분명히 보았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1.세상에서의 자아란 마음의 흐름 같은 것이다.
2.그 자아는 한 생의 인과론적인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3.그 원인들(카르마)이 그 생을 넘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한다.
4.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5.우리가 매일 매년 지속되는 자아처럼 보이는것은 그 인과론적 지속성 때문이다.
6.그 인과론적 양식은 하나의 개별적인 삶 그 너머까지 지속될 수 있다.

동서양 모두에서 우리는 최종적인 명료함을 볼 수 있고, '당신'과 '나'라는 생각이 사라진다.
주관과 객관이 없는 궁극적 지혜로 우리가 초월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마음, 물질의 이원론인 것이다.
상대적인 지식은 무상한 것으로 오랜 명상 수행을 한 후에만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진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것은 주체와 객체가 없는 최종적이고 영원한 진리이다.

덕은 그런 깨우침을 얻는, 계발된 능력이다.
개인으로 태어나는 것, 삶의 공포 그것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자유로 나갈 길을 보여준다.

궁극적 지혜로의 이동은 셰랍에서 예쉐로의 이동을 말하지만 반대로 예쉐에서 셰랍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다면?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았다. 침묵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말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대단하다 하더라도, 상대는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본질적인 통찰을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스승들은 침묵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실성과 깨달음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서,
스승의 역할에 맞게 침묵하는 것으로
붓다와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만나게 된다.






<마무리>
정확한 대답은 언제나 어렵다. 그런 토론의 과정이 지적으로 밝아지게 한다. 이해하지 못한 의미에도 열린 마음이어야 함을 알아야 했다. 철학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그 어느 때보다 머리에서 쥐가 났다. 이 작은 책이 더없이 두꺼워 보였다. 정리하기도 어려웠고 뒤섞였고 그대로 끝마쳤다.... 이미 다 밝혀진 철학적 사실들이 있음에 놀라웠고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없을 거란 생각도 잠시 들었다. 내세에는 죽은 자들의 말만 생각한다-는 그 말은 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밀랍 이야기, 칸트의 집이 곧 자료의 종합이란 예로 설명해 주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 밖에도 이해를 돕기 위한 플라톤의 이야기도 있었다. 완전한 이해가 아니어서 아쉽다. 카르마파의 셰랍과 예쉐란 말을 발음할수록 좋았다. 다르마를 공空 보다는 활발한 마음에 더 가깝다고 말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순야타의 개방이란 말도 좋았다. 스님들이 서양의 개념들을 설명듣고 대단히 인상받지 않는 점들도 재밌었다.

비개인적이란 말이 어려웠다. 서양의 개인적이고 객관이 강조되는 것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되겠는데... 그래도 어려웠다. 비개인적이고 비개념화란 말이 확 와닿지는 않았다. 서양철학의 계보 그리고 의문의 제기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에 머리만 복잡해 졌다. 헤겔과 키르케고르, 플라톤과 니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등등 이들 중 전통적인 방식으로 논증하며 자신의 입장을 수립한 사상가는 없다한다. 전통의 끝없는 회의와 독창성 자극, 관념의 모험의 대대적 전복 야기로 보인다 한다.

아시다시피 인류가 과거보다 고통의 정도가 나아지지 않았다. 전쟁, 쓰나미, 지진, 허리케인, 전염병, 기근, 대학살, 테러리즘,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인구과잉, 가난, 질병, 부패, 범죄 중독, 불안, 권태, 경박함까지 광범위하다. 해리슨 교수의 말론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붓다의 방법은 좌절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라 한다. 최후의 좌절인 죽음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라 한다. 
붓다처럼 모두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면 혼자 열반에 들 수 없을 테다...

이 책은 이성적인 서양인 다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는 번역자의 말처럼 동서양의 대분열 속에서 펨버턴 교수 나름으로 일직선상 위에 놓이게 했다. 애초에 중립성은 없다고 보아야 할까. 펨버턴 교수의 질문으로 시작해서 마무리한 책이다. 불교철학에서는 그 질문 자체가 처음부터 없지만 펨버턴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명료함이 좋았다. 질문해야지만 볼 수 있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이런 고민도 있다는 사실에 깨우침이 있었다. 



우리가 죽음에 임했을 때 비개인적인 순수 지성이 된다.
순수 지성 대신 순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붓다의 마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도 카르마파처럼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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