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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24. 2017

불과 글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

<불과 글>을 쓴 조르조 아감벤은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미학자, 비평가입니다.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1995년 푸코의 생철학과 슈미트의 비상사태를 토대로 로마 시대의 '호모 사케르'를 현대 정치에 비추어 쓴 <호모 세카르>를 발표하면서 이 시대가 가장 중요한 사상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벤야민과 하이데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블랑쇼, 들뢰즈, 바디우 등의 현대 사상가들과 플라톤, 스피노자, 유대-기독교 경전의 이론가와 학자들을 아우르는 사유 탐험을 지속해왔습니다. 저서 <빌라도와 예수> <왕국과 영광> <세속화 예찬> <예외 상태> <행간> 등이 있습니다.


불과 글              

저자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 ~ )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란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중에서

K는 계속 창가에 있었다. 안마당은 조그만 사각형 모양이었다. 안마당을 돌아가면서 사무실들이 들어서 있는데, 창문들은 이제 모두 컴컴했고 맨 위층의 창문들만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K는 애써 컴컴한 마당 한쪽 구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거기에는 손수레 몇 대가 서로 맞물린 채 모여 있었다.

K의 창가, 마당 한쪽 구석 손수레 몇 대, 또 다른 건물 맨 위층 달빛 받아 빛나는 창은 삼각형 모양의 단면을 그린다. 두 개의 쇼윈도 사이에 난 비어 있는 벽의 일부처럼 느낀다.

커다란 창문 두 개를 통해 들어온 달빛이 바닥에 있는 작고 네모난 두 개의 면을 비추고 있었는데, 방 안에는 묵직하고 오래된 가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들이 내려다본 그 자리는 K가 욕망을 품은 레니와 함께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인 것이다.


<불과 글> 조르주 아감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는 이쪽과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위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읽기가 불가능한 지점'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그 언어 속에 거주하면서 그 언어를 끊임없이 다루고 다스리는 무언가와 같다고 말합니다.



<소송> 리뷰 http://roh222.blog.me/220987992928


<불과 글>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이해하기

죄와 벌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와 일치한다.

인간이 감수하는 벌뿐만 아니라 4만 년 전부터(즉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을 상대로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재판 또한 사실은 말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을 취한다'는 것 스스로와 사물들의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스스로와 사물들을 알고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죄와 벌의 구속력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지상의 모든 법률 조항들 가운데 최후의 법령은 이런 식으로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언어가 곧 형벌이다. 
언어 속으로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죄의 분량에 따라 쇠해야 한다"

재판이 하나의 '신비'라면, 이 위로받을 수 없는 신비는 다름 아닌 이들의 제스처와 행위와 말들의 복잡한 그물망 안으로 죄와 벌을 모두 끌어당긴다.

구원도 속죄도 없는 신비, 
그 안에서 죄와 벌은 인간의 존재 속에 고스란히 체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신비는 반대로 인간에게 어떤 초원적인 지평이나 이해 가능한 어떤 의미도 제시하거나 부여하지 못한다. 신비는 포착 불가능한 제스처와 고유의 과정과 비밀스러운 공식으로 존재할 뿐이지만 이제는 인간의 삶과 너무 가깝게 밀착되어 있어서 삶 자체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인식도 어떤 종류의 정의 실현도 허락하지 않는다.

재판은 항상 진행 중
인간이 인간적으로 변한 뒤에 비인간적으로 남는 일을, 인간적인 차원에 들어섰다가 벗어나는 일을 결코 그만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상 인간적이면서도 아직은 인간적이지 못한 존재의 신비, 동물적인 또는 더 이상 동물적이지 않은 존재로서의 신비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한, 그가 판사이면서 동시에 죄수로 등장하는 재판의 판결문은 결국 증거가 충분히 명백하지 못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것이다.

p26-35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나는 죽어 있다.
욕망이라는 것이 내겐 없으니까, 나는 욕망하지 않는다.
소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소유한다고 믿는 것은 내가 주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목격하고, 
아무것도 없음을 목격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주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변화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간다.

르네 도말 Rene Daumal(1908~1944)

프랑스의 시인, 작가, 철학자,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찍이 젊은 시인들의 동호회를 형성하고 문예지를 운영하며 열성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후에 네르발과 랭보의 독서에 몰두하며 구르지예프와의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신비주의적 사상에 도달하게 된다.
말년에 결핵과 빈궁에 시달리며 쓴 미완성 소설 <유추의 산, 1952>을 통해 진지하고 소박한 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일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삶이나 작품이 아닌 행복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삶의 형태란 한 작품을 위한 작업과 자기 연단을 위한 작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
화가, 시인, 사상가는 
어떤 창조 활동과 작품의 '저자'라는 이유로 
주권을 지닌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름 없이 살아간다.

언어가, 시선이, 몸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매번 무위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관조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험을 시도하고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삶의 형태로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다.

오로지 이 시점에서만 
작품과 위대한 작품, 금속으로서의 금과 
철학자들의 금이 여지없이 일치하게 될 것이다.

<불과 글>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 중에서 발췌 p183, p218


 




연단 Refine이란 뜻은 불순을 걸러 내고 더 순수한 금속을 만들기 위한 과정, 또는 때로는 몸과 마음을 단련시킨다로 쓰입니다. 성경에서 '연단'을 번역된 원어는 히브리어 자카크(씻는다 거른다), 차 라프(녹이다 제련하다), 헬라어 도키마조(금속제련), 퓌로(불을 통과하다) 등 다양한 단어들이 쓰이고 있습니다. <불과 글>에서 조르주 아감벤이 쓴 <불과 글>이란 제목은 어디에 더 가까울까요? 


르네 도말과 카프카 이 두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자신이 죽어있으니 욕망이 없고, 욕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카프카는 글쓰기가 그저 끄적임에 불과하다고도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글쓰기 자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이 어디로 향했으며, 어디에서 평화를 얻었는지에 대해 계속 토로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연민한 것은 인류일 테지요. 개인의 존재를 구속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고하는 듯도 합니다. 이 모든 책임은 '그것'에 있다고요. 그것을 깨닫는 하나의 존재는 비참할 수도 있고, 비극적일 수도 있습니다. 무지로 인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테죠. 어떤 존재는 그 사실에 절망하고 '무'로 남겨지길 그토록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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