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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24. 2023

고전을 만나는 시간

앨런 제이콥스 저



현대인들이 과거와 소통해야 하는 이유

고전을 읽는 것의 가치




인간의 생각과 삶 전체가 나선 계단과도 같다. 같은 지점과 같은 주제로 계속해서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매번 돌아올 때마다 경험의 수준은 한층 더 높아져 있는 그렇게 관점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주어진 아이디어나 느낌, 자각 등은 이전과 어딘가 다소 달라 보이게 된다.



과거가 심하게 잘못되었고, 진부하며, 사람들이 극복한 끔찍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더럽히기까지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생각이 상당 부분 정보과부하(평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와 사회적 가속화(세상이 변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빨리 변화하고 있다는 자각)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의해 과거의 부정이 촉발된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다양한 선택지, 지나친 선택의 자유는 젊은이들에게 '그릇된 선택'을 내린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래 호라티우스는 그런 강박관념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덕'은 어디에서 오는가?'와 같은 문제들로 관심의 초점을 옮기라고 충고한다. 



사람들의 삶이 과거와 미래를 더 많이 포괄할 때, 인간의 대역폭은 더 두터워지고 인격 역시 더 견고해진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이 현재에 더 맞춰질수록 그만큼 더 보잘것없어진다. 어쩌면 5분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다. 매 순간 상황에 맞춰가며 사는 삶은 삶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페이스북 뉴스피드가 날리는 아주 가벼운 이슈에조차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의 밀도가 결여되어 있다. 시간의 대역폭은 인간에게 필요한 그 밀도를 제공해 준다. 속도를 늦춰줌과 동시에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정신없이 바쁜 멈춤'의 상태로 묘사되는 상황을 개선해 준다. 



고전 읽기를 통해 두터워진 인격의 밀도는 우울증이라는 파도 앞에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고,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칠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항구가 되어줄 수 있다. 행동할 순간이 왔다는 자발적인 판단이 설 때까지 자신을 붙들어줄 인격의 밀도를 갖출 필요가 있다. 그 밀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순간에서 빠져나와 더 큰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느 분야의 사업이든 10년 내로 사라지거나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겪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사업 계획을 세울 가능성이 작아진다. 이뿐만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사회적, 기술적, 기후적 측면에서) 전혀 알 수 없다면 아이를 가질 계획을 세우기도 쉽지 않다. 어쩌면 일주일 뒤에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는 것조차 꺼릴지 모른다. 그 사이에 훨씬 더 나은 선택지들이 등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포기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고전을 만나는 시간저자앨런 제이콥스 (엮음)출판미래의창발매2022.03.07


       



앨런 제이콥스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서간집_편지를 모아 엮은 책>을 대학 학부생들에게 가르친 적이 있다. 편지에서 호라티우스가 롤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쓴 편지 하나를 함께 읽었다. 편지에서 호라티우스는 어떻게 해야 '고요한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고요한 마음, 누가 그걸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2천여 년 전 이탈리아 농가에 살았던 늙은 작가 호라티우스는 어떻게 해야 평정심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대체 호라티우스는 무엇에 대해 초연해질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의 아버지는 노예 생활을 하면서 삶의 일부를 보냈지만 이후 돈으로 자유를 샀고, 아들인 호라티우스에게 최상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출세했다. 아버지 덕분에 그는 한때 플라톤이 세운 아테네 학당을 다니기도 했다. 그 후 호라티우스는 군인 겸 정치가로 활동했는데 불행하게도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를 반대하는 정치 운동에 가담하면서 전 재산을 몰수당한 뒤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 still_loony, 출처 Unspl



그의 시는 당시 세도가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였던 마에케나스의 관심을 끌었고, 마에케나스는 호라티우스의 후원자가 되어 그에게 교외 지역이었던 사빈에 농장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그가 농가에 앉아 무엇이 마음의 평정을 이루게 하는지 숙고하게 된 건 이런 그의 삶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자신이 도망쳐 나온 그 미친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이끌려 들어갔다. 결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항상 위험한 장소였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연결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시골구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직 마음만 요동칠 뿐이었다. 호라티우스는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먼 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형식으로 된 편지들을 써 내려갔다. 




호라티우스는 자기 자신과 현재의 우리에게도 '현자의 저술들을 읽어보라'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짜 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그건 그들이 우리와 생활양식 자체가 다른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일상의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돈과 사소한 것들에 관한 강박적 집착으로부터 끄집어내 준다. 




그 집착은 우리를 괴롭히고, 학대하며, 불안하게 교차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며, 생각에서 생각으로, 감정에서 감정으로 띄어 다니도록 우리 자신을 내모는 그런 집착이다. 그토록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런 유형의 불안감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건, 비록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강도가 훨씬 심하다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된다.






과거는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과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격의 밀도'가 더 높아진다.



© anniespratt, 출처 Unsplash




현재 우리가 겪는 경험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시는 스스로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떠오른 생각을 저널리스트 웬 스티븐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혼란의 시대> 집필을 마치고 난 후,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반응을 알아내기 위해 20세기 말의 문학 작품들을 뒤적이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요즘 소설들은 정말 아무런 자료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 책들은 너무 개인과 정체성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문제들을 바라보는 그 어떤 시각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런 거대한 힘에 대처하는 일종의 사례나 모범을 제시하길 바라는 작가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현대 이전으로 돌아가 그 당시의 작품들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중세 시대의 벵골 문학을 접했다. 그가 자기 문화권의 오래된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그 이야기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자신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참사들을 자각하고 거기에 반응을 보이는 방식은 실로 놀라웠다. 그것이 비록 작품 속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은 현재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법을 배운 건, 그의 동시대인들이 아니라 선조들에게서였다.




앨런 제이콥스



영문학자이자 작가인 그는 미국 베일러대학교 아너스 프로그램(Honors Program)(최상위권 학생 교육 프로그램)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특훈교수(Distinguished Professor)다. 앨라배마대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부터 2013년까지 휘튼칼리지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현재까지 15권의 책을 출간했고,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 [크리스천 센추리(The Christian Century)], [뉴요커(The New Yorker)],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결론**

우리는 과거와 관련해 긍정적 선택의 태도를 취하면서, 인간적 관계와 인간적 가치의 진짜 알맹이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그 목소리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미래와 의미 있는 약속을 만들어 갈 수 있고, 우리가 선조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과거를 활용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과거 그들을 타인이 아닌 이웃으로서 대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친척으로서, 인류라는 거대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대해야만 한다. 작가들은 우리에게 선조들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인류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있는 한 명의 친구로 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옛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그들은 우리가 극복한 편협함과 사악함의 본보기로서가 아닌 이웃으로서, 심지어 스승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들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조차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단순한 관심을 넘어선 사랑을, 후손들에게 바라는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랑을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


앨런 제이콥스는 자계서는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강제하는 것들에 영향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계서와 고전 이 둘을 다 놓치지 말고 이해해 보자고 다짐했다. 한동안 고전 읽을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고서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고전을 읽고 싶어졌다.


저자 앨런 제이콥스는 밀도가 높은 환경이 인격의 밀도가 낮은 개인들을 양산해냈고, 무한한 선택을 제공하는 듯 보이는 세상은 실제로는 선택이 거의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버렸으며 이에 인격의 밀도를 향상해야 한다는 주장은 먼 과거에서 먼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의 사슬에서 고리로서 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결국 사랑의 계보를 옹호하는 주장이다.


이런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또 이런 책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함께 들었다. 책을 고르기 위해서 이웃분들 책장도 보고, 추천도서 목록을 보기도 했다.  모르는 작가와 작품들을 읽어나갈 자신이 솔직히 없어졌다. 읽을 수 있을 책을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뭔가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나만 아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막연하게 손 길 닿는 대로 차근히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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