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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Jun 11. 2017

어둠이 되기 전, 내 영혼의 공백은 푸르렀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저자 에드몽 자베스



*
-. 네 시선은 무엇이냐?
-. 내 책의 시선이오.
-. 네 들음은 무엇이냐?
-. 내 책의 들음이오.
-. 네 호흡은 무엇이냐?
-. 내 책의 호흡이오.
-. 네 바람은 무엇이냐?
-. 내 책의 바람이오.
-. 네 행운은 무엇이냐?
-. 내 책의 행운이오.
-. 네 죽음은 무엇일 것이냐?
-. 책의 마지막 지면에서 나를 훑는 죽음이오. 우리가 공유한 모든 죽음의 죽음이오.


*
글을 쓰는 자세는 고독한 자세다.
고독이란, 즉각 존재를 다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일컫지 못한다.
글 쓰는 사람은 단어로 자신의 고독을 맞이한다.
책 하나하나, 제 고독의 동굴들.


*
한 송이 장미 앞에서, 설명할 길 없는 우리네 태도
장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감탄한 몸짓으로, 우리는 장미의 삶을 앗아간다.
쓰기란 자신에게 이러한 몸짓을 새로 되풀이하는 일이다.
우리 안에서 죽는 것은 우리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책이란 그저 이 모든 죽음 알리는 일상의 부고일 따름이다.






애드몽 자베스(1912.4.16-1991.1.2) 프랑스 시인, 프랑스 현대시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애드몽 자베스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이집트에서 태어나 프랑스 교육을 받은 프랑스 시인이다. 1930년 처음 파리에 방문하였고, 1957년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1967년 몬트리올 세계박람회에서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1987년 프랑스 시인상을 수상했다.

자베스의 초기 시집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매우 뚜렷이 볼 수 있다. 자베스의 언어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잔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파울 첼란처럼 프랑스에서 살면서 독일어로 글 쓴 유대 작가와 비슷했고, 블랑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문학의 한계, 언어의 한계에 도전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자신의 시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베스는 사막, 책, 이방인, 모래, 유대인, 공허, 우물 등을 존재나 언어의 은유로 즐겨 썼다. 자베스의 사상은 인간의 본질을 찾는 데 있다. 자베스는 말한다. '인간은 모두 유대인이다'라고. 인간에게 거처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레비나스는 '진정한 시인은 거처가 없다'며 자베스를 높이 평가했다. 유대계 미국 작가인 폴 오스터는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인 이 세상에서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다'라는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말을 대신하며 자베스 작품의 핵을 들여다본다. 자베스가 볼 때, 먼저 글쓰기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서는 대학살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언어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려면 작가는 자신을 의심의 유배지, 불확실성의 사막으로 추방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
온 시간이 하나의 시선 속에 붙들려 있다.
무한히 우리의 두 눈을 열고, 순간이 우리의 두 눈을 닫는다.
영원은 오직 망각 속에만 있을 따름이다.


*
나는 분명 내 책들의 기억이다.
그러나 나의 책들은 어디까지 내 기억이었던가?


*
떠나는 자 어디로 가는가?
제 정체성을 찾고자 떠나, 그는 타자를 발견했다.
그는 일찍이 알았다.
이 타자로 인하여 자신이 스러질 것임을, 
측량할 길 없는 간격에서 자신이 그것과 구분되며 
또 제 고독의 면모가 떠오름을.

이 안에서 살아간다. 
언제나 저 너머에서 죽는다.
하지만 경계란 마음의 일이다.


*
신을 신에, 생각을 생각에, 책을 책에 맞서게 하여,
너는 하나로 다른 하나를 소멸시키리라.
그러나 신은 신을, 생각은 생각을, 책은 책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바로 그들의 생존 속에서 너는 계속해서 그것들에게 도전하리라.
사막이 사막의 뒤를 잇는다.
죽음이 죽음의 뒤를 잇듯이.
(상처받지 않은 상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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