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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Sep 26. 2015

혀끝에서맴도는이름.. 언어와 한몸을 이루면 시詩가 된다

시학(詩學) Le nom sur le bout de la langue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Le nom sur le bout de la langue



소설보다 소설을 쓴 작가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그는 글을 쓰게 된 걸까? 글로 무엇을 풀어낸 걸까? 비밀을 캐듯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작가에겐 고통이었을 시간들이 글로 변환되면서 고통은 사라지는 것일까? 자신을 다 들어내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이 남기 때문일까?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고 읽히면 그 글들은 사라지는 것일까? 영원해지는 것일까? 나는 또 한 명의 작가와 마주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파스칼 키냐르...  

나는 결여된 언어를 성급하게 침묵의 형태로 맞바꾼 아이였다.(p70)



파스칼 키냐르는 어린 시절 자폐증을 앓았다. 그는 내면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데 어려움과 한계를 호소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자신을 침묵의 파수꾼이라고 표현한다. 한편의 동화로 '이름' 하나 '단어' 하나가 의미하는 바를 아주 의미 깊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누군가 당신의 소원을 이뤄주고 단지 자신의 '이름'기억해달라 한다.  일 년 뒤 다시 의 이름을 말해주기만 하면된다. 만약 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녀는 잊을 리 없다고 얘기하지만 9개월이 흐르고 잊어버린다. 동화 속 주인공 콜브륀과 쥔느, 그리고 하얀 망토의 영주'아이드 비크 드 엘' 이들의 이야기는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으나 도저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이름은 그녀의 입술 주변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데 있었고, 느껴지는데도, 그녀는 이름을 붙잡아서, 다시 입속에 밀어 넣고, 발음할 수가 없었다.(p37)



그는 유아 우울증이 생긴 이유는 엄마 대신 자신을 돌봐주었던 무티(독일어 Mutti '엄마'라는 뜻)라고 부르던 젊은 독일 여자와 헤어지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무티'라는 이름은 엄마의 이름보다 더 소중했고 몸의 끝에서 맴도는 단 하나의 이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얘기한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동화는 그의 비밀이었다.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p71

  - 말을 거부하며 말하기

  - 말없이 말하기

  - 길목에서 지켜 서서 결여된 단어를 기다리기

  - 독서하기

  - 글쓰기



한편의 동화 속에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모두 들어있었다. 영주의 이름을 잊어버린 콜브린은 비참함에 몸을 떤다. 차라리 죽음 선택하려고 한다. 죈느는 그녀의 고통을 알아 차리고 길을 나선다. 땅속으로 바닷속으로 절벽 사이로 그가 나선 길 끝에 그 영주의 이름을 알아오지만 그녀에게 말해주려는 순간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년이 되는 마지막 날을 두고 그는 쉼 없이 피땀을 흘리며 콜브린 곁에 돌아와 그녀에게 그 영주의 이름을 알려준다. 영주는 죽음의 사신..... 한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파롤 parole은 개인이 발화하는 언어를 가리킨다.(p76)
언어를 통해서만 '저 세계'에 갈 수 있다. '저 세계'는 파롤이 말하고 싶어 하는 무엇이다.(p89)



내가 쓴 글을 내가 다시 쓰려고 해도 똑같이 써 내려가긴 어려울 것이다. 내 몸, 내 기억의 어디를 통과해서 나온 단어 하나하나는 내가 알 수 없는 기억 속에서 망상 속에서 환상 속에서 꿈속에서 내 부모에게서 나의 친구에게서 나와 스쳐 지난 이들에게서 나도 모르는 그런 것들이 가득한 곳에서 걸러지고 골라지고 발화되어 결정적인 이 순간에 여기에 쏟아지고 있다. 나의 침묵 속에서 나오는 이 단어는 내가 내 존재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돼준다. 내 존재가 여기. 지금. 이렇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가 생존을 위해 글을 쓴다는 이유를 나는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혀끝에서 맴도는 아직 봉우리 상태의 언어를 어떻게 발화시키느냐 그것의 어려움을 여러 가지 형태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의 상태... 우리가 느끼는 대로 흘러나올 수 있는 언어란 것은 이제 없다. 잃어버린 얼굴이다.




글쓰기란(p108)

  - 잃어버린 것의 시간을 취하기 / 감동은 기억을 되살릴 시간을 갖는다.

  - 귀환할 시간을 갖기 / 기억은 되돌아올 시간을 갖는다.

  - 잃어버린 것의 귀환에 협력하기 / 단어는 다시 떠오를 시간을 갖는다.

  - 기원은 또다시 아연실색케 할 시간을 갖는다.

  - 앞면은 얼굴을 되찾는다.


파스칼 키냐르에게 글쓰기란(p111)

  - 연어가 산란을 위해, 즉 죽기 위해 일생 동안 필사적으로 거슬러 오르는 모 천이다.

  - 연어는 모천에 다다르면 산란하고 죽는다.

  - 글쓰기는 산란하기다.



글 쓰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것인가? 살아내기 어렵고 용기가 없고 휴일도 없고 불안에 떨며 핑계와 속임수... 욕구는 남은 사람? 우리 모두가 결함이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명이 아닌 나머지는 모두 죽음인 것처럼... 그는 자신이 부재했던 시간에 이를 때까지 무아의 경지, 결여된 이미지 기원에 있는 빈칸....

진짜 단어들은 그것을 말하는 자를 욕망으로 떨게 하거나, 목소리를 터무니없이 쉬게 만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게 한다.(p116)




글 쓰는 사람(p117)

부재하는 단어에 몰두하여 무엇을 되찾으려 한다.

그 무엇이란 언어를 알지 못하는 것,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

언어를 공포에 떨게 하고

글 쓰는 자의 나날을 열정적으로 몰아가는 것,

공격을 위해 공격하는 것,

태어나는 것,

존재하는 것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

산란하는 것,

산란하고 두렵게 하는 것,

지옥의 사자들을 귀찮게 하는 것,

자신보다 선재하는 질서와의 관계를 끊는 것,

공존하는 생존자들과의 관계를 끊는 것,

살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것이다.




언어는 무한한 정성으로 보살핌 받지 못하면 끊임없이 고사(枯死) 하는 관목들이다. '되찾은 단어'는 불가사의이다. 이 불가사의가 '시'라고 키냐르는 말한다. '허탈'을 추구한다는 키냐르의 글은 어떤 글일까? 죈느가 피땀흘려 영주의 이름을 콜베륀에게 말하고 환희의 표정을 짓고 쓰러지는 그 순간 모든 게 완벽해지면서 허탈함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언어? 언어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지식? 지식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전세상'으로 되돌려 보내고, 끊임없이 되살리고, 다시 생명을 부여하고, 다시 상류로 올려 보내고, 생명을 소생시키고, 태양을 다시 빛나게 하는 일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영감 illumination을 추구한다.(p118)



이 책은 동화와 에세이(이론)로 이루어져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파스칼 키냐르는 이야기하고 있다. 무척 어지럽고 울렁거린다. 모르겠는 것들은 집어던지고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글들을 건져올렸다. 줄 세워서 세워보고 널어보고 뽑아서 나열해보기도 했는데 그게 그냥 전부인채 끝났다. 뭘 어디서 깨닫는 건 중요한 게 아닌 거 같다. 수수께끼였고 여전히 수수께끼였다고 믿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p84)




By 훌리아

보리차를 유리글라스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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