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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Oct 10. 2017

이런 생각들은... 나 자신의 노래

월트 휘트먼

- 인간 휘트먼에 관한 시 -

1892년 캠던

커피 냄새, 신문 냄새.
일요일, 일요일의 권태. 아침이다.
어떤 우화적인 시가
신문의 흐릿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행복한 동료 시인의 공허한 약강5보격 시.
노인은 허름하지만 품위 있는 방에
쭉 뻗은 채 창백하게 누워 있다.
천천히 눈을 들어 피곤한 거울 바라본다.
눈이 얼굴을 본다. 이제 놀라지 않고 생각한다.
그 얼굴이 나라는 걸. 노인은 느릿느릿 손을 뻗어
덥수룩한 수염과 메마른 입을 만진다.
끝이 멀지 않았다. 노인의 목소리가 선언한다.
나는 거의 죽은 사람, 그럼에도 나의 시에는 삶과
삶의 황홀한 가락이 있지. 난 월트 휘트먼이었네.


월트 휘트먼



- 휘트먼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시 -

이런 생각들은 모든 시대 모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했던 생각,
그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네.
만약 그것이 내 생각도 아니고 당신 생각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無일 뿐,
무가 아니라도 무에 가까운 것일뿐,
만약 그것이 수수께끼이자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일 뿐,
만약 그것이 멀리 있으면서 동시에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일 뿐,
이것은 땅이 있고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자라는 풀,
이것은 지구를 감싼 흔한 공기.

보르헤스 : 휘트먼은 자유시를 창안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에요.
그중에서도 아마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일 거예요.
성경의 시편을 읽고 월트 휘트먼을 읽어보세요.
휘트먼이 시편을 읽었다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그 음악은 달라요.
모든 시인은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키고, 거의 모든 시인이 자신의 언어도 발전시키지요.
위대한 시인이 언어를 거쳐가면 언어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아요.
뭔가 변하죠.
월트 휘트먼의 경우에도 언어가 변했답니다.
휘트먼은 방언을 즐겨 썼어요. 그렇지만 독자들은 휘트먼이 그걸 잘 구사하는 법을 몰랐다고 느끼지요.
방언을 쉽게 사용한 마크 트웨인과 샌드버그와 달리 휘트먼은 다소 허둥댔지요.
그는 프랑스어 단어, 스페인어 단어 등을 썩 훌륭하게 사용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월트 휘트먼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압도 당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나는 그를 유일한 시인으로 느꼈답니다.
나중에 키플링에게서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는데, 그들은 매우 다른 시인들이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휘트먼을 '유일한' 시인으로 생각했고, 시가 가야 할 바른 길을 찾은 사람으로 생각했답니다.
물론 시를 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모든 방법들이 서로 달라요.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 (1819년 5월 31일 ~ 1892년 3월 26일)



월트 휘트먼 은 미국의 시인, 수필가·기자였다.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에는 두 양상이 모두 흔적으로 남아있다. 미국 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며 종종 "자유시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풀잎》(The Grass, 1855)이 있다.

11세의 나이에 정식 학교 교육을 마치고, 가정 형편으로 인해 일을 시작 한다. 처음에는 2명의 변호사의 심부름꾼으로, 그 다음 롱아일랜드의 주간지 《패트리어트》의 인쇄견습공으로 일했고, 여기서 인쇄기 및 조판에 대해 배웠다. 1837년 대공황에 따르는 불황이 겹치면서 난항을 겪었다. 1836년 5월, 롱아일랜드 햄프스테드에 살고 있던 가족에 합류했다. 1838년 봄까지 일시적으로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교직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직을 그만둔 후 그는 뉴욕 헌팅턴으로 돌아와, 자신의 신문사 《롱아일랜더》를 창간 한다. 휘트먼은 출판자, 편집자, 인쇄공, 판매, 배달까지를 모두 혼자서 담당했다. 10개월 후, 출판사를 크로웰에게 팔았고, 크로웰에 의한 최초의 호는 1839년 7월 12일에 출판되었다.

-사상-
그는 자유시의 제일인자이자 창시자로 불렸으며,서민의 희망·감회를 자유로운 수법으로 솔직히 노래하였다. 그 밖에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미국의 독특한 문학을 주장한 <민주주의 전망>은 미국 물질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인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시론-
휘트먼은 《풀잎》 1855년판 서론에서 "시인의 증거는 시인이 국가에 헌신하는 만큼의 깊은 애정을 가지고 국가가 그를 포옹해 주는가"라고 주장을 하였다. 휘트먼은 시인과 사회 사이에는 빼놓을 수없는 공생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내 노래》에서 전능적인 1인칭의 이야기를 이용하여 특히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서사시로 뛰어난 영웅을 등장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등장시킨다. 《풀잎》은 또한 당시 미국에서 진행하고 있던 도시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도 반영하고 있다.
-종교-
휘트먼은 이신론에 깊이 빠져 있었다.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모든 종교를 대등하다고 생각하였다. "내 노래"는 주요 종교, 그 모두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상은 《조상과 함께》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속에서 그는 "우리는 모든 이론, 신화, 신, 반신을 받아들이는 / 나는 오래된 이야기, 성경, 족보는 하나도 남김없이, 진실이라고 본다"라고 적고 있다. 1874년 심령주의 운동을 위해 시를 쓰도록 요청받은 휘트먼은 "나에게는 대부분 값싸고, 조잡한 꼼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휘트먼에게 신이란 어디에나 있고, 초월적이며,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고, 급진적인 발전 상태에 있는 것이었다.
-노예해방-
휘트먼은 미합중국에서 노예제도 유지를 반대하는 《윌못 조항》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론자(어볼리셔니즘)은 아니고, 이 운동에는 이익보다 해가 많다고 보고 있었다. 1846년 그는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실제로는 그 "극단주의와 전횡적인 태도를 위해서, 목적의 달성을 늦추고 있다"라고 썼다. 그의 주된 주장은 폐지론자의 방법은 민주적인 절차를 저해하며, 남부군의 거절과 마찬가지로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휘트먼은 또 해방된 흑인일지라도 투표권은 인정되어서는 안된다는, 당시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고 있던 견해를 지지하면서, 의회에서 흑인계 의원의 증가를 우려하였다.

- <위키백과> 발췌 -





보르헤스가 말하는 시 이야기는 비밀노트 같았고 재밌다고도 생각했다. 휘트먼의 시 이야기는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세상에는 참 좋은 시인이 많구나  만나서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는 시를 영원히 모를 것이다. 시는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그런 흐름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니깐. 분명 는 다른 물길을 트겠지만, 결코 휘트먼이 될 순 없을 거다. 시는 '숨어있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드러나는 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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