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말
책이 지루하면 내려놓으세요.
그건 당신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읽고 있는 책에 빠져드는 걸 느낀다면 계속 읽으세요.
의무적인 독서는 미신 같은 거예요.
- 보르헤스 -
보르헤스가 가장 먼저 읽은 책은 그림 형제의 <그림 동화집>이었다. 그 다음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었다고 한다. 1905년? 1906년?에 처음 읽은 그 책들을 그 이후로도 계속 읽었다고 한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과학 소설의 아버지 허버트 조지 웰스 작품 <타임머신>, <최초로 달에 간 사람>, <모로 박사의 섬>, <투명인간>, <신의 음식>, <우주전쟁> 읽고서는 보르헤스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공상 과학 소설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라비안나이트>, <돈키호테>, 웰스의 책, 루이스 캐럴(찰스 럿위지 도지슨의 필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유명작)의 책을 계속 다시 읽었다고 한다. 그의 첫 독서 경험이었다. 그리고 러디어드 키플링의 <열 가지 신비로운 이야기>, <정글북>을 좋아했고, 계속 작가의 다른 책을 읽었다. 그밖에도 마크 트웨인의 <고난의 길>, <캘리포니아에서의 처음 며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에드거 앨런 포와 쥘 베른의 소설을 읽어나갔다.
아이들은 그저 즐거워서 책을 읽는 거랍니다.
내가 허용하는 유일한 책 읽기 방식이 그거예요.
책 읽기를 행복의 한 형태로, 기쁨의 한 형태로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보르헤스의 말 / 저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
출판 마음산책
보르헤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관한 시를 한 편 써서 우마르에게 헌정했다.
그는 그걸 불태워버렸다.
보르헤스는 그가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거였다.
'여기 단어로 된 기억이 있군.
이 곳에는 인류가 쓴 모든 시, 모든 꿈, 모든 소설이 있어.
난 이 도서관을 불태워서 책들을 재로 만들어버릴거야.
어차피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책을 다시 쓸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정말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 보르헤스의 시 http://roh222.blog.me/220996547657
나는 내 운명이 읽고 꿈꾸는 것임을 알았어요.
어쩌면 글을 쓰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글쓰기는 본질적인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늘 낙원을 정원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생각했어요.
그건 내가 늘 꿈을 꾸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 문학적 운명, 보르헤스 -
보르헤스는 영어나 독일어 또는 라틴어에 숙달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신이 스페인어에 숙달했는지 몰라했지만 그 모든 게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일했는데, 낮에는 줄곧 시와 이야기를 구상했고, 밤엔 꿈을 꾸는 일이었다. 시와 이야기를 구상하는 것은 꿈을 꾸는 것과 같았다. 조수가 오면 한 페이지의 글을 그에게 받아쓰게 했다.
현실적으로 글쓰기 좋은 방법은 가능한 많이 쓰고(요즘말로 토해내기) 그걸 수정하는 방법이라지만, 그는 한 문단을 쓰고 그걸 수정하고, 두 번째 문단을 썼다고 한다. 글을 쓰는 내내 산만한 느낌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어쩌면 어느 정도 애드거 앨런 포와 월트 휘트먼이기도 했다. 악몽(추리소설)과 시를 함께 표현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모비딕 같은 하얀 악몽이 떠오를까?
보르헤스는 시를 쓰는 진정한 벙법은 자신을 꿈에 수동적으로 맡기는 것이라한다. 악몽의 섬뜩하고 매우 이상한 맛은 선물일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시에서 추론을.. 악몽에서 소설의 플롯을.. 얻곤 했다. 사물과 현상을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고, 세상을 꿈으로 보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 꿈을 풍요롭게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 위해선 꿈을 꾸도록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었다.
- 정말로 작가라는 것은 끊임없이 꿈꾸는 사람 -
* 작가의 운명 http://roh222.blog.me/221102448774
보르헤스 눈이 멀어서 몹시 외로웠다. 그는 학구적인 탐색이 필요한 에세이를 포기하고 단편소설과 산문시와 운문시를 구술하여 받아쓰게 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문학 얘기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심리학 교수였고 어린시절 그에게 철학을 즐거운 방식으로 가르쳤다. 문제들을 스스로 느껴보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1) 관념론 (보르헤스와 아버지의 대화)
"이 오렌지는 무슨 색깔이니?"
"오렌지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붉은색과 노란색 사이의 색이에요"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불을 끄거나 또는 네가 눈을 감는다면....."
"이 오렌지는 어떤 맛일까?"
"오렌지 맛이요"
"너는 정말 이 오렌지가 낮 동안 내내, 그리고 밤새 내내 고유한 맛을 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거기까지는 모르겠어요"
"이 오렌지의 무게는 얼마일까?"
(보르헤스는 오렌지를 손에 쥐고서 관념론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논의 역설들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도록, 느끼도록 이끌었다.)
2) 유아론
만약 유아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내가 탁자를 이렇게 탁 칠 때 시작하는 거예요. 아니, 그때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이미 과거니까요.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 내가 탁자를 친 순간에 일어난 거예요. 이런 식으로 계속하게 되고, 그리하여 결코 끝나지가 안죠. 우리가 정말 유아론자라면 우리는 현재를 존재하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를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현재는 미끄러지듯 나아가므로 우리는 아주 적은 양의 과거와 아주 적은 양의 미래를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그게 우리를 세계사로, 전 세계의 온 과거로, 미래 등으로 이끄는 거예요.
나는 허구fiction를 쓰지 않아요.
사실fact을 창조하죠.
사실과 허구는 차이가 없어요.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답니다.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면
(물론 결코 알 수 없겠지만)
그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게 될 거예요.
<마무리>
소설의 세계 '독자의 꿈을 사로잡는다는 것' 작가들이 바라보는 소설의 세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여전히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소설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은 아주 소설화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반대이기도 하고요. '이거 실화냐?'는 웃픈현실을 생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걸작이 신화가 되는 순간 그 책은 죽은 것이 된다는 샤를 단치의 말은 매섭기도 했어요. 계속 변신해야만 하는 책은 스스로 관을 짜고 있을지도 몰라요. 조금은 암담하지만 한계를 모른채 책은 나아가고 있는 거겠죠? 어쩌면 더이상 읽혀지지 않기 때문에 소수만 놀라워하다 잊혀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지난 3년간 제가 독서한 느낌은 그랬어요.
영혼회귀, 시간회귀-라는 말이 생소했어요. 작가들이 바랐을 거듭되는 변신을 말했던 것일까요? 시대에 맞게 새롭게 읽혀지는 것 만큼 커다란 변신은 없겠지요... 보르헤스는 "나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게 아니예요."라고 말해요. 실제로 강연이나 인터뷰 중엔 그가 살아있었지만, 제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엔 그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게 아니예요." 가 되어버렸어요.
책을 읽는 것은 경험이에요.
여자를 보는 경험, 사랑에 빠지는 경험, 길을 걷는 경험 같은 거지요.
독서는 매우 현실적인 경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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